Tiny Hand With Heart
[20240815] 헌릿 _ 미뉴에트의 화원
2024. 8. 18.

GOOD BYE

 

미뉴에트의 화원

W. 팀 라퓨타

 

 

KPC & PC

 

KP
선비

 

 

 

 

분홍색 장미 나무 아래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원문 시나리오 링크 : https://posty.pe/kiujjl

 

 

 

 

 

 

※ 아래 백업 로그에는 시나리오의 진상 및 내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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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뼈를 꺾고, 헌터와 쉐리는 드디어 열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방안 생활도 묽은 죽과 수프로 이루어진 식사도 끝입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똑똑. 노크 소리가 문을 두드립니다.
 
선생님:좋은 아침이에요, 헌터.
 
문 너머에 서 있는 것은 당연히 선생님입니다.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건네주며 미안한 얼굴로 당부합니다.
 
아직 다른 친구들의 열병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당분간 병간호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요.
 
선생님은 헌터와 쉐리의 상태가 비교적 온전하다는 이유로 돌봐주지 못하는 것이 퍽 미안한 모양입니다.
 
헌터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네요.
 
식사도, 놀이도, 숙제도 오직 두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일상.
 
그것은 지나치게 지루하거나 편안한 구성일 겁니다.
 
선생님:식사한 그릇은 싱크대에 넣어주세요. 환기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창고에 새 시트가 있을 테니 두 사람의 것만이라도 갈아둘래요?
 
헌터 버틀러:...말씀해 주지 않아도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갇혀 산 지가 몇 년인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배려도 잊은 채로 혼잣말했다.) 제가 할 테니 가서 일 보셔도 되어요.
 
선생님:하하, 그렇죠. 헌터는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혼자서 잘하니까요. 덕분에 안심이에요. 그럼 쉐리랑 밥 맛있게 먹어요.
 
트레이에 담긴 아침 식사는 단출합니다.
 
돌볼 아이들이 많으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아무래도 준비하기 어려웠겠죠.
 
당근과 감자, 양파 따위를 잘게 썰어 끓인 카레와 고슬고슬한 흰 밥, 갓 튀긴 새우튀김과 닭튀김. 후식으로는 오리 모양의 망고 젤리가 담겨 있습니다.
 
자, 아직까지 자고 있는 쉐리를 깨워 함께 식사합시다.
 
헌터 버틀러:(한숨을 쉬고 트레이를 내려둔다.) 쉐리, 일어나. (이런. 날선 목소리가 나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침 먹어야지.
 
쉐리 B. 로즈:우응.. (꾸물거리며 이불 안으로 머리 끝까지 파고 들었다.) 좀만 더 자고 먹을래.. 배 안 고파-..
 
헌터 버틀러:(이불을 잡아 주욱-... 당기자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난다.) ...못생긴 얼굴하고 자네. (놀리는 것처럼,) 계속 이상한 표정만 보여줄 거야? 네 얼굴 이렇게 기억하게 될 건데.
 
쉐리 B. 로즈:(으익! 다시 이불 당기려 했지만 꿈적도 하지 않는다.) ..못됐어. 옛날엔 좀 더 다정하게 깨워줬는데. 예쁘다고 해주고 그랬는데에~ 사랑이 식었어? (일으켜 달라는 듯 누운 채 두 팔만 허우적거렸다.)
 
헌터 버틀러:(힘을 빼고 있었지만, 당겨보겠다고 낑낑대는 모습을 보니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기분이 별로라서 그래. ...여전히 예뻐. 그러니까 예쁜 눈 떠서 이쪽 좀 봐봐. (팔 사이로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일으킨다.) 잠도 깨야지.
 
쉐리 B. 로즈:그럼, 당연히 예쁘지. (그제야 배시시 웃으며 널 안고 일어났다.) 왜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야? 나 이제 다 나아서 하나도 안 아픈데. 헌터랑 많이 얘기하고 같이 간식도 먹을 수 있다구.
 
헌터 버틀러:(일어난 네가 품 안에서 움직여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느린 어조로 대답한다.) ...선생님이 이것저것 시켜서. (...) 오늘따라 귀찮은가 봐. 많이 먹을 수 있어? ...그럼 오늘 망고 젤리 나왔던데, 두 개 먹어.
 
쉐리 B. 로즈:이러고 있으면 아침 못 먹어! (꺄르르 웃으며 널 꼭 안고 얼굴을 마구 부빗거리곤 죽 밀어냈다.) 어쩔 수 없지. 아직 친구들이 다 나으려면 멀었으니까. 내가 도와줄 테니까 힘내~ 망고 젤리도 같이 먹고, 응? 헌터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거야!
 
헌터 버틀러:(벌어진 거리만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을 뻗어 네 머리를 살살 쓰다듬더니,) 안 먹어도 계속 안고 있으면 배불렀을 거야. (농) 그래. 한 명이라도 덜 보내도록 노력해야지. 선생님 혼자서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왜? 예전에는 불평 없이 먹어줬잖아. 네가 단 걸 먹어줘서 좋았는데...-.
 
둘은 말끔히 그릇을 비웁니다. 헌터의 젤리는 결국 쉐리의 몫이 되었지만요.
 
헌터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부터 할까요?
 
헌터 버틀러:(그래도 시트는 갈아둘까. 쉐리가 자는 침대고...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침대 시트 교체하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쉐리 B. 로즈:응! 창고에 있었던가? (내려가는 길에 치워야지. 쟁반에 빈 그릇을 주섬주섬 올렸다.) 그것만 하면 돼? 선생님이 이것저것 많~이 시켰다면서?
 
헌터 버틀러:늘 창고에 있었으니 같은 자리에 있겠지. (네 손에 들린 쟁반을 자연스럽게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치우라고 하셨어. 방 환기도 지시했을 건데... 내가 할게.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아, 비가 오겠네. 낮은 어조가 나온다.)
 
창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여름의 바람이 붑니다.
 
케케묵은 먼지들은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에 이리저리 몸을 뒤틉니다.
 
방을 한 바퀴 돌아보면, 열병에 시달리기 전과 똑같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말이에요.
 
헌터의 시선이 문득 책상에 닿습니다. 구석에 놓인 것은... 오르골입니다.
 
헌터 버틀러:...이거 어떤 음악이 나왔던 건지, 기억해? (오르골을 들어 살피며,)
 
미뉴에트를 불태우고 무너지는 흙더미 사이에서 찾아낸 오르골입니다.
 
네 개의 낮은 다리가 지탱하는 몸체는 금속으로 촘촘히 엮여 있고, 장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단단히 잠겨있어 무슨 수를 써도 열리지 않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람피온을 꺾어 만든 열쇠도 맞지 않습니다.
 
쉐리 B. 로즈:엣.. (맞다, 그런 게 있었지. 워낙 예전 일이어서 잊고 있었다.) 그걸 아직 가지고 있었어? 그때 못 열지 않았었나.. 왜? 갑자기 열어보고 싶어졌어?
 
헌터 버틀러:들어보지도 못한 음악... (그래서 기억 속 한 구석에 묻어 존재를 말살한 채로 고여있던 거구나, 오르골을 다시 책상에 내려둔다.) 신경쓰이잖아. ...열리지 않으니까, 도전 정신이 생긴다고 해야겠지.
 
쉐리 B. 로즈:하지만 열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 우리 둘 다 자물쇠 따기에는 재능이 없는걸. 잠겨있는 걸 뭐든지 열 수 있는 초능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저 오르골도 열고, 꽉 잠긴 잼 뚜껑도 쉽게 열 수 있고~ (조잘거리다 퍼뜩 정신 차렸다.) 아! 이런 얘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자자, 빨리 청소하고 같이 놀자. 체스 대결하기로 했잖아. 오늘은 내가 이길 거야!
 
헌터 버틀러:람피온 밖으로 나가면 열 방법을 찾아보자. 낡은 상자를 전문으로 열어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선생님한테 부탁하기는 좀 그렇고. (쟁반을 들고 문으로 향한다. 문 앞에서 멈춰, 너와 보폭을 맞춘 뒤에 다시 걸어간다.) 어제는 십자말풀이더니, 오늘은 체스야? (...숨) ...쉐리, 오늘도 내가 이길 거야.
 
쉐리 B. 로즈:그러려면 한.. 5년은 더 기다려야겠네. 하나의 기다림이 끝나면 또 다시 기다림이라니. 비운의 주인공 같아. (널 따라 사뿐사뿐 1층으로 내려가다 토라진 얼굴로 네 앞을 막아섰다.) 십자말풀이는 헌터에게 더 유리했어! 나보다 10년이나 더 많이 공부했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공평하게 체스로 대결하는 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뭐. 헌터가 실수할지도 모르잖아. 나한테 지면 벌칙으로 음, 헌터랑 일주일 동안 따로 잘 거야. (...) 아니다, 3일!
 
헌터 버틀러:기다림이 있는 미래는 좋은 거야. 아무것도 기다릴 수 없는 내일이 비극이지. 살 이유가 없잖아. ...뭐라도 있어야 주인공이 안 죽고 하루를 넘기지 않겠어. (발걸음을 뚝 멈춘다. 행여 너에게 식판에 남은 음식물이 튈까 쟁반을 위로 올리면서 대답한다.) 십자말풀이 때도 같은 말을 들었지. ...실수 안 했지만. (생각에 잠긴다.) 그래, 3일 동안 따로 잘게. 대신 내가 이기면 이틀 내내 껴안고 지낼 거야. 어때? 공평한 수준의 벌칙이지?
 
쉐리 B. 로즈:음.. 하긴 나도 내일 간식이 케이크라는 기다림이 있으면 기쁘긴 해. 그럼 이걸 열려면 헌터 옆에서 5년 후까지 기다려야겠네~ 좋아, 그렇게 해! 나 대신 껴안고 있을 인형을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을 거야. (널 막아서던 걸 멈추고 다시 주방으로 총총 걸어갔다.) ..근데 그게 벌칙이야? 날 껴안고 있으면 헌터도 아무것도 못할 텐데?
 
그릇을 싱크대에 넣으려 하면.. 이런, 이미 쌓인 그릇이 많아 자리가 없어요. 지저분하네요.
 
헌터 버틀러:... ... (가만히 바라보다가 싱크대 옆 빈 자리에 쟁반을 둔다. 그릇을 정리하며 충분히 보일 법한 위치다.) 이제 가자.
 
쉐리 B. 로즈:..저렇게 두고 가도 괜찮아? 선생님 혼자 하기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싱크대 힐끔)
 
헌터 버틀러:(싱크대 앞에 서서 그릇을 들고 물을 틀었다.) 그러네. ...생각해보니 좀 도와드려도 될 것 같아. 시간도 많으니까. (그릇을 박박 씻으며...)
 
쉐리 B. 로즈:헤헤.. 착하다, 착해. 착한 어린이에겐 상으로 뽀뽀를 해주겠어요~ (선생님 흉내내며 발꿈치를 들어 네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행주를 가져와 옆에서 그릇의 물기를 닦았다.) 헌터는 가끔.. 15살이 아니라 5살 같아.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귀여운 꼬마.
 
헌터 버틀러:(손에 묻은 거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손이 더러워 뺨을 문질러 수줍은 마음을 표현하지도, 너의 머리카락을 애정으로 쓸어주지도 못했다.) 약간 바보같은 사람이 오래 사랑받는다고 들어서, 요즘 그러려고 노력 중이야. (장난으로 받아치며,) ...어른스러운 게 좋아?
 
쉐리 B. 로즈:푸하하, 누가 그런 말을 해? 마틸다가 그랬어? 으음~ 글쎄, 난 헌터라면 다 좋아. 바보처럼 구는 것도 귀엽고, 어른스러운 것도 멋져 보여. (잠시 고민하다가) 어른스러운 건 나중에 어른이 돼서 해도 되니까 지금은 바보같은 헌터를 좋아할래! (마지막 그릇까지 깔끔히 물기를 닦아 정리한 뒤 손수건을 꺼내 네 손을 톡톡 닦아주었다.) 둘이 하니까 금방 끝났네! 이제 시트 가지러 가자.
 
헌터 버틀러:여자애들 대부분 그랬어. 특히... (뱉지 못하는 이름을 삼켰다. 열기에 녹아 사라진 이름은 람피온의 뒷 편에 묻혀 꺼내지지 않을 터였다.) 이런. 지금보다 더 멍청하게 웃을 자신은 없는데... (깨끗해진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내밀어 네 볼에 입술 자국을 남긴다. 이제 보답할 수 있네.) 그래. ...가자.
 
새 시트를 교체하려면 우선 창고에 방문해야 합니다.
 
차곡차곡 접힌 흰 시트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따뜻한 냄새가 납니다.
 
방에 돌아와 기존 시트를 벗기면,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베개 아래에서 열쇠가 떨어집니다.
 
상아를 깎아 만든 듯 흰색의 열쇠. 끄트머리에 분홍색 장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생김새입니다. 꿈의 문을 열어준 바로 그 열쇠니까요.
 
꿈에서 본 그 열쇠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걸까요?
 
헌터 버틀러:...오르골 열쇠일까? (열쇠를 주워 바라본다.)
 
쉐리 B. 로즈:대문 열쇠는 아닌 것 같고.. 한 번 끼워보자! 정말 열리면 오늘이야말로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헌터 버틀러:그래. 이상한 음악은 아니겠지... (의심스럽게 눈을 좁히며 열쇠를 오르골에 끼워본다.)
 
오르골에 새로운 열쇠를 끼우면 찰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돌아갑니다.
 
그리고 열린 오르골 안에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작은 손잡이를 돌려봐도 소리 없이 잠잠하고 고요합니다.
 
복잡하게 얽힌 태엽과 부품은 빙글빙글 돌아가지만, 여전히 묵음.
 
작은 상자는 끊임없는 침묵에 빠집니다.
 
고장 난 건가?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말이에요.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내부에 결함이 숨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습니다.
 
손가락 한 마디에 못 미치는 작은, 아주 작고 작은 태엽 하나가 없다는 것을요.
 
이토록 복잡하고 정밀한 오르골이란 때론 부품 하나가 모자라 소리를 내지 못하고 쓸모를 잃는 법이죠.
 
열쇠가 마련되었고, 문 또한 열렸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창밖으로 우는 새소리만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쉐리 B. 로즈:에.. 이게 뭐야. 기대했는데! 이것도 5년 기다리면 해결할 수 있어?
 
헌터 버틀러:...장인은 어떤 부품이 부족한지 알 거야. 같은 부품만 구하면 들을 수 있어. (떨떠름하게 오르골을 내려둔다.) 하던 일 계속할까.
 
쉐리 B. 로즈:그러니까- 결국 저택 안에서는 음악을 들어볼 수 없다는 거잖아. 이게 뭐야, 열쇠를 찾아서 기대했는데! (투덜거리며 새 시트를 깔고 헌 시트는 벗겨내서.. 네게 뒤집어 씌웠다.) 아하하, 유령이다! 나는 가서 체스판 가져올 테니까 이거 갖다놓고 와!
 
헌터 버틀러:나가서 질리도록 들려줄게. (잘 보관해두라며 오르골과 열쇠를 책상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옮겼다. 몸을 전부 펴기도 전에 시야가 새하얗게 가려져 동작을 멈춘다.) ...유령에게 심부름 시키는 거야? (...) 알았어. 유령답게 저택 한 바퀴 천천히 돌고 올게. (시트를 머리에 쓴 채로 문을 나선다. 세탁실...)
 
우리는 도저히 마지막 부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어요.
 
그것을 찾아내는 건 한참 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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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 7th fanmade scen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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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깜빡. 눈을 뜨면 완전히 익숙한 천장입니다.
 
당신의 저택, 당신의 방 안, 당신의 침대.
 
긴 시간을 보낸 장소지만, 앞으로 이곳에 올 일은 생기지 않겠죠.
 
오늘은 5월 31일. 19살의 봄이 끝나는 날입니다.
 
장미가 피어나는 여름의 시작, 6월 1일이면 우리는 졸업식을 치르고 저택을 떠납니다.
 
헌터는 봄과 여름의 경계선에서 깨어나 이별을 직감합니다.
 
10살을 넘긴 람피온이 없다고 했던가요.
 
당신이 저택 밖으로 걸어나간다면, 헛소문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겁니다.
 
헌터야말로 살아있는 증명이기에.
 
고개를 돌리면 펼쳐둔 짐가방이 눈에 들어옵니다.
 
활짝 열린 트렁크에는 양말 몇 쌍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쉐리 B. 로즈:가져온 물건은 전부 챙겨갈 거야?
 
언제 일어난 걸까요? 욕실에서 나온 쉐리는 헌터의 가방을 내려다 봅니다.
 
옆에 나란히 놓인 가방은 텅 비어있습니다. 쉐리의 것입니다.
 
쉐리 B. 로즈:뭘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
 
쉐리는 겸연쩍게 웃습니다.
 
쉐리에겐 저택에서 받은 소지품이 전부입니다.
 
세계에 연고가 없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쉐리 B. 로즈:가방은 크고 담을 건 없으니 헌터라도 넣어갈까~
 
헌터 버틀러:(똑같이 텅 빈 가방을 내려다본다. 그럴래. 짧게 대답만 하고 손 하나를 가방에 넣으며 몸을 웅크렸다. 들어갈 턱이 없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들어갔을 건데. (잠시 침묵했다.)
 
쉐리 B. 로즈:바-보. 이제 곧 어른이 되는데 아직도 바보 같아서 어떡해. 그리고 그동안 많이 자라긴 했지만.. 4년 전에도 헌터는 컸어. 가방이 안 닫혔을 거야. (부쩍 자라버린 널 침대에 널부러져 빤히 바라봤다. 이젠 아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졸업식은 하지 않았지만, 쉐리의 눈에 비친 헌터는 완벽한 어른이었다.) 졸업이라니 안 믿긴다. 저택 바깥은 잘 상상이 안 돼. 여기랑 완전 다를까? 아님 비슷해? 더 즐거운 게 많아?
 
헌터 버틀러:(이미 커버린 몸은 아무리 구부려도 가방에는 맞지 않았다. 별로 내키지 않아 한 손은 여전히 가방 안에 넣은채로 몸을 폈다. 밤새 고민해도 넣을 물건이 없었던 자신의 가방도 한쪽 구석에 밀어두었다.) ...4년 전에는 지금보다는 할 만한 도전으로 느껴졌겠지. 그때는 이런 것도 못했잖아. (커다란 손을 뻗어 너의 얼굴을 가려본다. 다 가려지네,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달라. 여기보다 다양하고, 그만큼 덜 안전하지. ...괜찮아. 내가 안내해줄게.
 
쉐리 B. 로즈:(손을 뻗어 네 손에 깍지를 껴 꼭 잡았다.) 불공평해. 10살 땐 내가 헌터 옷을 입어도 얼추 맞았는데. 지금은 나만 두고 이렇게 훌쩍 커버렸어. 분명 밥은 내가 헌터보다 더 많이 먹었단 말이야. (투덜투덜) 헤.. 위험한 곳이야? 책에서 본 것처럼 으슥한 뒷골목으로 날 끌고 가서 "아가씨, 가진 거 다 내놔." 같은 말을 하려나? 그건 좀 궁금한데. (철없는 소리인 줄 모르고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헌터 버틀러:...너도 많이 자랐어. 어렸을 떄랑 비교하면 다른 사람 같아. (디저트만 많이 먹어서 예상보다 덜 자란 게 아니냐는 짓궂은 대답을 하며 손을 잡은 널 잠시간 빤히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가 이마를 툭, 기댄다.) 이벤트를 기대하는 거라면 해줄게. (네가 호기심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뒷골목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혼쭐을 낼 필요가 있었다.) 아가씨, 가진 거 다 줄래? 돈은 됐고, 보석도 됐고. 아가씨를 주면 딱이겠네.
 
쉐리 B. 로즈:흠~ 어떻게 자랐는데? 더 예뻐졌어? (다른 것도 많이 먹었거든! 널 째릿, 노려보다 맞닿은 이마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런 이벤트가 있어야 멋진 사람이 와서.. 에, (예상 못한 대사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곧 참지 못하고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큼큼, 아, 안 돼요. 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요! (흠..) 이러면 헌터가 1인 2역 해야 하는데 어떡해? 대사를 바꿔야 하나? 좋아요, 절 가지세요? (쪽, 짧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렇게 하면 돼?
 
헌터 버틀러:...밖에 나가서 세상 구경해볼 생각은 안 하고, 멋진 사람 꼬셔서 인생 펴볼 생각만 했어? 네가 그렇게까지 바깥 로맨스에 관심이 있을 줄을 몰랐어. (너의 웃음을 불만스럽게 한 귀로 들리며 가느다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어진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눈썹이 풀렸다.) 아가씨,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기보단 나와 새로운 재미를 추구해 보지 않겠어.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삐딱하게 대꾸한다. 하, 이래서야 못된 일탈에 판타지만 심어주는 꼴이다.) ... (...) ...허. (헛웃음을 뱉는다.) 밖에 나가서도 이럴 거야?
 
쉐리 B. 로즈:아~니, 구경도 하고 로맨스도 찍고 싶었는데? 그냥 구경하는 것보다 멋진 사람이랑 같이 구경하는 게 훨씬 로맨틱 하잖아. 내가 맨날 로맨스 소설만 읽는 거 몰랐어? (어라, 이거 나름.. 매우 흥미롭다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널 초롱초롱 하게 바라봤다. 이제 더 안 해주나?) 으음~ 생각해보고? 사귀는 사람이라던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없는데 괜찮지 않을까-.. 헌터가 싫다고 하면 안 할게.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물론 절대 그럴 생각은 없다. 그냥 널 놀리고 싶을 뿐.)
 
헌터 버틀러:(귀하게 키웠더니 하등 의미 없구나, 날을 세우기 바쁜 자신을 보며 선생님이 할 법한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알지. 네가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사랑을 꿈꾼다는 것도 알아. 귀족 같고 다정한 남자가 창문을 두드려주는 꿈을 꾸지?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눈빛에도 마음은 아랑곳않았다.) ...그런 사람 잘 없어. (...) 어쩌면 전 세계를 뒤적거려도 힘들까. 하지만 네가 바란다면 찾아봐 줄 수는 있어. (불만을 숨길 생각도 안 하고 말했다. 네가 바란다면,에 힘을 주었다.) ...싫다고 못해. 네 꿈 중 하나잖아. (...) ...노력하면 나도 네 소설 속 주인공이 될까?
 
쉐리 B. 로즈:(질투하는 건가? 간질거리는 기분에 입꼬리를 내리려 입을 앙다물었다. 어떡해, 너무 귀여워. 10살 어린애면 몰라도 지금 헌터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런 꿈을 꾸긴 하지만.. 내 상대는 항상 헌터였는걸. 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헌터가 내 소설의 주인공이었어. 바보, 내가 로맨스 소설을 계속 본 건 그런 남자를 찾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랑 그런 로맨스를 하고 싶어서... (..) 곧, 여름이라 그런가. 좀 덥네.
 
쉐리는 민망한지 붉어진 얼굴로 말을 돌립니다.
 
쉐리 B. 로즈:그러는 헌터는! 졸업하고 뭐하고 싶은데? 이제 어른이니까 뭐든지 다 할 수 있잖아.
 
헌터 버틀러:(이토록 심장 소리가 큰 적이 없었다. 급히 몸을 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 쿵쾅거리는 심장이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했다. 정신이 홀린 듯한 표정을 덤덤하게 다잡았다. 그러게, 덥네. 형편없는 대답을 보낸다. 밖에 나가면, 네가 소설 속에서 보던 장소로 데려가 줄게. 그 대답을 끝으로 같이 말을 돌렸다.)
...딱히. 일단은 집에 돌아가서 안부 인사를 하고, 마을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어.
 
쉐리 B. 로즈:그것도 좋겠네! 음~ 원래 헌터의 마을이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어른이 되어도 변함없을 거야! 다들 변함없이 헌터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분명 기다리고 있다가 기쁘게 반겨주겠지. 헌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른이 될 거라고 내가 장담해.
 
헌터 버틀러:(과거에 가끔씩 돌아다녔던 마을을 떠올린다. 애초에 자주 가지도 않았으니, 뭐가 변했는지 잘 판단하지도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네 앞에서 아는 척이나 하겠지.) 살가운 마을은 아니었는데. (...) 일단 우리 부모님은 널 좋아하실 걸.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른으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시겠지.
 
쉐리 B. 로즈:그럴 리가, 헌터가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내가 마을의 어른이었다면 헌터를 볼 때마다 사탕이라도 쥐여주고 싶었을걸? (잠시 침묵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네게 기대어 앉았다.) 헌터, 지금 행복해? 그러니까, 행복했던 만큼 나 때문에 슬펐던 날도 많았잖아.
 
헌터 버틀러:...예전에 가판대를 구경하다가 사탕을 받은 적은 있어. 그때도 단 건 입에 맞지 않아서, 다른 친구에게 줬었지.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을 이었다.) 괜찮아. ...예쁜 사람은 곁에 두기 힘들다니까, 참아야지. (숨) 앞으로도 슬프게해도 돼.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70
판정결과: 실패
 
부스럭,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설마 벌레는 아니겠죠?
 
헌터 버틀러:...무슨 소리 안 들렸어? (두리번,)
 
쉐리 B. 로즈:응, 나도 들었어. 방에 뭐가 들어왔나? (소리가 들린 곳을 들춰보며)
 
얇고 빳빳한 재질의 무언가가 옷더미 속에서 구겨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종이학입니다.
 
헌터 버틀러:종이학이 있어. ...네가 접은 건 아니지? (조심스럽게 펼쳐본다.)
 
종이학을 꺼내 펼쳐보면 익숙한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1960년 5월 31일에 남겨진 메모입니다.
 
아주 어릴 때 주웠던 종이학이 이런 곳에 구겨져 있었네요.
 
종이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쉐리는 헌터의 손을 잡습니다.
 
장미가 피어나는 여름의 시작, 6월 1일이면 우리는 졸업식을 치르고 저택을 떠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해요.
 
헌터 버틀러:
정신
기준치: 45/22/9
굴림: 60
판정결과: 실패
 
쉐리의 손바닥이 유독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긴장하고 있었던 걸까요, 날이 덥기 때문일까요.
 
헌터에게 가벼운 미열이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짐 정리가 끝나면 점심시간입니다.
 
뻐꾸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지만, 식사시간을 알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도 먹지 못했죠.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하네요.
 
1층으로 내려가면, 식탁 위에는 그야말로 만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모든 자리에는 이름을 쓴 카드가 놓여 있고요.
 
로즈메리를 올려 향긋하게 구운 로스트 포크, 허브를 뿌리고 버터를 발라 부드러워질 때까지 찐 감자, 마요네즈와 칠리소스로 버무린 바삭바삭한 새우튀김.
 
가지의 속을 비우고 고기와 채소로 가득 채워 익힌 이름 모를 요리와 리코타 치즈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까지.
 
해산물을 넣고 푹 끓인 수프에서는 바다 냄새가 납니다.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스테이크까지.
 
후식으로 마련된 레몬 세미프레도는 식사를 마치고 바로 먹으라는 메모까지 남겨져 있네요.
 
꿈 속 헌터의 집에서 먹었던 것처럼, 근사한 차림입니다.
 
매혹적인 향기에 다른 아이들도 홀린 듯이 주방으로 모여듭니다.
 
" 지금 먹어도 되나? "
 
" 선생님이 오시면 다 같이 먹자. "
 
" 난 배고픈데... "
 
아이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 듯, 굶주린 아이는 먼저 앉아 포크를 들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는 먹지 않을 생각인 듯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헌터는 어떻게 하나요?
 
헌터 버틀러:(음식에 욕구가 낮으니 허기랄 것도 없었다. 속닥거리는 아이들의 대화에 가끔 흥미를 주며 선생님을 기다렸다. 의심스러운 어른이라도 대접은 받아야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은 오지 않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식은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헌터 버틀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51
판정결과: 보통 성공
 
그러고 보니 요즈음, 선생님이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지었던 게 생각나네요.
 
줄어든 말수, 수척하게 야윈 뺨, 어둡게 내려앉은 눈가……. 졸업을 앞두고 이별을 준비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쉐리 B. 로즈:음-.. 일단 우리도 밥 먹을까? 메모까지 남기신 걸 보니 늦게 오실 것 같은데.
 
헌터 버틀러:그럴까. (감자 조각을 입에 넣으며 네 접시에 수북하게 음식을 넘겨주었다.) ...많이 먹고 더 커.
 
쉐리 B. 로즈:...(수북하게 쌓인 음식이랑 널 번갈아 쳐다봤다.) 난 같이 먹자는 뜻이었지. 전부 내가 먹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는데.. 배 안 고파? 아침도 안 먹었잖아. 저녁은 언제 먹을 줄 알고! (포크로 새우튀김 하나를 찍어 코 앞에 내밀었다.) 자, 어서 아 해!
 
헌터 버틀러:...내키지 않아서... (난처하게 눈동자를 빗겨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맛있게 먹어 치우는 친구들을 보니 속이 더부룩해졌다.) ...알겠어. 조금이라도 더 먹을게. (입 벌려 받아먹는다.) ...너도 먹어. (샌드위치를 집어 입술에 갖다 댄다.)
 
쉐리 B. 로즈:잘 먹어야 힘을 내지. 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이제 여기서 밥 먹을 일도 없는걸. (네가 먹는 모습을 보고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평소보다 훨씬 화려할 뿐만 아니라 맛도 훌륭하기 짝이 없습니다. 음,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요. 최후의 만찬처럼요.
 
혀 위에 오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식사하는 사이, 창밖은 차츰차츰 어두워집니다.
 
비가 올 것인지 하늘이 칙칙하기 짝이 없습니다.
 
봄의 해가 기울고, 여름의 먹구름이 찾아옵니다.
 
헌터가 식사를 마치고 레몬 세미프레도를 입에 넣으면 적당히 차고 달고 새콤한 것이 입안을 누비고……
 
쿵. 달그락. 쨍그랑. 와장창!
 
식탁 위로 아이들이 쓰러집니다.
 
스푼과 포크, 나이프며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가 함께 요란합니다.
 
엎어진 수프는 바닥을 붉게 적시며 불길히 퍼져 나갑니다.
 
졸업의 기대감으로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음식에 독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하지만, 헌터와 쉐리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식탁에 쓰러진 아이들과 접시의 음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역시 저택의 경비나 아이들의 치료법을 옆에서 배운 뒤 죽이는 게 나았나. 무심한 얼굴로 식탁에서 일어나다가 옆자리의 널 떠올리며, 침착하게 끌어안고 토닥였다.) 괜찮아. 무슨 일인지 살펴볼게. (...더 먹지 말고, 아이들을 본다.)
 
그대로 의자에서 떨어지거나, 음식이 담긴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습니다.
 
19살. 퍽 자랐으니 이제 이런 예의 없는 짓은 졸업할 나이가 됐을 텐데요…….
 
쓰러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색은 평온하고 숨소리가 고릅니다.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잠에 빠졌을 뿐입니다.
 
음식물이 얼룩덜룩 묻은 뺨과 소매가 더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잠든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죠.
 
헌터 버틀러:(...더러워졌네. 한손으로 음식에 박힌 머리를 잡아 올리려다가 네 눈치를 한 번, 양손으로 들어 올린 뒤 냅킨으로 닦아주기까지 했다.) ...큼. (음식을 살핀다.)
 
겉보기에는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습니다.
 
냄새를 맡아도 특별히 이상한 구석은 없고요.
 
……아니, 딱 하나 이상한 일이 있긴 했죠.
 
평소라면 아무 자리에나 앉았잖아요. 네임 카드 같은 것은 없었는데.
 
음식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었던 걸까요?
 
모두가 잠든 저택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졸업식이 바로 내일인데, 선생님은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한 걸까요?
 
아니, 다 떠나서, 선생님은 대체 어디에 있죠?
 
뒤바뀐 저택의 계절은 어김없이 누군가의 부재로 시작됩니다.
 
마치 저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에게 먹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쉐리 B. 로즈:..저기, 헌터.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네게 다가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있잖아.. 그, 듣고 화내지 않겠다 약속해줘......
 
헌터 버틀러:(가만히 이어질 네 말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인다. 불안감이 깃든 얼굴을 했지만 빠르게 갈무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화낼 일이 뭐가 있겠어. ...안 낼게. 말해봐.
 
쉐리 B. 로즈:사실 선생님께 부탁한 게 있어. 졸업하기 전에 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선생님은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했고. 난 저택 근처로 잠깐 나가게 해주거나 밤에 정원에 나가게 허락해주는 건 줄 알았는데, 아마 나 때문인 것 같아..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마지막 날까지 커다란 사고를 치다니 널 볼 면목이 없었다.)
 
헌터 버틀러:(침묵이 내려앉았다. 음식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끝을 눌러 뒤집어엎었다. 고요 속에 그릇 뒤집어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났다.) ...네 탓이 아니야. (...) 보통 둘만의 시간이라고 하면, 방에서 둘이 이야기하거나... 그래, 네 말대로 밤 산책을 떠올리잖아. 부탁을 빌미로 원치 않는 약을 먹이는 짓은... 아, 그래. 옛날에는 사형감이었지. (뒤틀린 상황에 어울리는 말을 꺼낸다.) 선생님을 찾으러 갈까. 친구들을 깨워야해.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을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저택 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방에는 안 계실 것 같지만. (선생님 방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본다.)
 
문고리를 돌리면 가볍게 열립니다.
 
헌터의 방보다 조금 넓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책상책장침대를 볼 수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숨어 계십니까? (책상 아래로 고개를 숙인다. 흡사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다.)
 
책상 아래에는 편지 몇 장이 떨어져 있습니다.
 
위를 보니 편지 더미가 쌓여있네요. 람피온들에게 온 편지입니다.
 
허나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십, 수백 통의 편지가 어딘가에 쌓여있다 쏟아낸 것처럼 말 그대로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라뇨? 이런 편지는 전해 받은 적이 없는데요?
 
집에서부터 오는 편지가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이미 도착한 편지를 전해주지 않다뇨.
 
……. 이상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하나씩 검열하고 있던 거지.
 
헌터 버틀러:(인간성의 밑바닥을 보고 나니 분노도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편지를 꺼내 살핀다.)
 
이미지
 
다른 편지도 대체로 비슷한 내용입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찾을 수 없다, Rose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네가 잘 살아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걱정된다…….
 
그렇게 쏟아지던 편지는 올해 봄이 시작되던 시기부터 끊어졌습니다.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69
판정결과: 실패
 
편지가 너무 많아 분류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선생님은 어째서 편지를 숨긴 걸까요? 지금의 헌터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헌터 버틀러:람피온에 증오를 가졌나, 아니면 특별한 아이를 모아두고 부모 행세를 하며 자기만ㅈ, ... (유난히 정제 없는 문장이 만들어져 입을 꾹 다물었다. 놀랐으려나, 네 어깨를 감싸 토닥인 뒤에 책장으로 향한다.)
 
쉐리 B. 로즈:..헌터는 선생님이 미워? (눈치만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네가 선생님을 탐탁치 않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만큼 겉으로 드러낸 적이 있던가.)
 
헌터 버틀러:...흐-음. (네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라보자,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 싫은 마음은 없어. 단지, 본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거기다 범죄까지 저질렀으니... 잘해줄 이유가 없어진 거야.
 
쉐리 B. 로즈:(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헌터 말이 맞아. 그래도.. (...) 이런 상황에서 정말 바보같은 말처럼 들리겠지만, 난 선생님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 무슨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아, 물론 선생님이 잘했다는 건 아니고!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직접 들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고.
 
빼곡한 책장에는 천문학과 과학에 관련된 책이 자주 보입니다.
 
물고기자리의 주기, 가을 별자리 포말하우트, 절대영도의 존재, 기상 이변과 기후 변화…….
 
헌터 버틀러:
자료조사
기준치: 65/32/13
굴림: 88
판정결과: 실패
 
쉐리 B. 로즈:헌터, 저기! (책장 맨 윗칸에 있는 두꺼운 책들 사이에 끼워진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쉐리가 꺼내기엔 높다..)
 
헌터 버틀러:(관심 없는 눈빛으로 책장을 훑어보던 시선이 네게 닿자 희미하게 생기가 돋는다.) ...뭐 꺼내줄까? (네게 다가가 뒤에 붙어서며 서류 봉투를 꺼냈다.) 자, 여기.
 
이미지
 
서류의 끝에는 익숙한 실링이 찍혀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딱딱한 낯으로 보고서는 바라보다가 4분의 1크기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역거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어디에 죄를 물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 죄인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어떤 얼굴로 바라볼지 생각하던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양산 방법을 연구 중이지만 복제를 위해서는’, ‘유전자 샘플’ ......선생님, 되도록 멀리 도망가셔야겠다. 위협적으로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쉐리. 앞으로도 선생님이 말 걸면 대답하지마. 다가가지도 말고, 그럴 수 있지? (싸하게 굳은 입 끝에 힘을 주어 올린다.) 혹시 침대 아래에 숨으셨을까? (다가가며,)
 
흰 국화 몇 송이가 침대 위에 얼기설기 떨어져 있습니다.
 
이미 혼수상태이던 아이들은 죽었고, 더는 추모할 일이라곤 없는데 어째서 흰 국화를 준비해둔 걸까요?
 
국화 사이에 얇은 메모지가 한 장 섞여 있습니다.
 
꽃의 수를 세어본다면, 남은 람피온의 수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만 없는 방에는 기묘한 꽃향기만 가득합니다.
 
다른 곳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흰 국화 두 송이를 들었다.) 아직 안 시들었네, 선생님 만나면 드리자. ...방에는 없으시네. 어디로 가볼까.
 
쉐리 B. 로즈:(국화는 고인의 명복을 빌 때 두는 꽃 아닌가. 왜.. 왜 선생님께? 이유를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최대한 선생님이 안 계실만한 곳이...) 노, 놀이방? 의외의 장소에 계셔서 못 찾고 있는 걸지도 몰라!
 
헌터 버틀러:그럼 놀이방으로 가보자. (국화꽃 두 송이를 바지 벨트 사이에 끼우고 방을 나선다. 너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놀이방으로 걸어갔다. 와중에도 보폭을 맞추며.)
 
어렸을 적 자주 놀던 곳. 바닥에는 두꺼운 매트가 깔려있어 발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벽을 따라 2층짜리 수납장이 설치되어 있고, 칸마다 다른 장난감이 들어있었는데…….
 
수납장을 열어보면, 장난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동안 안 들어오긴 했지만, 언제부터 없었던 걸까요?
 
이제는 장난감을 갖고 놀 나이가 아니지만, 괜히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쉐리 B. 로즈:앗, 언제 다 없어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악어 장난감이랑 체스판은 슬쩍 빼둘걸 그랬나 봐. (아쉬움에 빈 수납장 안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헌터 버틀러:그러게. 쓸 사람이 없어질 걸 미리 아는 것처럼 싹 치워뒀네. (수납장 안을 휘적이는 손등을 장난스럽게 토닥인다.) 나가면 예쁜 색으로 칠해진 체스판 사줄게. 아직 내기도 못 했잖아.
 
쉐리 B. 로즈:검은색이랑 흰색이 아닌 체스판도 있어? (맞다, 내기. 그러고 보니 옛날에 하기로 했지만 누가 가져갔는지 체스판을 찾지 못해서 십자말풀이를 다시 했었지. ..물론 내가 졌다.) 기억하고 있었네. 투덜거렸으면서 엄~청 하고 싶었나 봐. 그렇게 벌칙이 탐나? (키득거리며 두 팔을 벌려 널 폭, 안아봤다.)
 
헌터 버틀러:...응, 다른 색으로 칠한 체스판도 있어. 붉은색이나 분홍색도 있겠지. (네 색으로 물든 선물을 들고 환하게 웃을 얼굴을 떠올리며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렸다.) 고작 4년 전 일이니까 기억해. 널 처음 만났던 날도 기억하고. (입매를 느슨하게 올렸다. 토닥토닥,) 당연하지. 늘 이틀 내내 붙어있고 싶었어.
 
쉐리 B. 로즈:우와, 신기해! 체스판이 아니라, 음.. 과자처럼 보일 것 같아! (분홍색 체스판을 열심히 떠올려 봤다. 체크무늬 쿠키..)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나도 헌터를 좋아하지만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10년 동안 쭉 같이 있었잖아! 기억해야 할 게 너무 많다구. (미심쩍다는 눈빛) 그럼 말해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대화를 했을까요~ (고개만 살짝 들어 널 올려다봤다.) 이때까지 붙어있었던 걸로는 부족해? 음, 지금 생각해보면 헌터랑 붙어있는건 나도 좋지만 그래도!
 
헌터 버틀러:예쁜 장식품처럼 보일지도... 네가 체스는 안 두고 매일 구경만 할지 걱정되네. 제대로 나랑 시합해 줄 거지. 유감스럽게도 이때까지로는 부족해. (수납장에서 손을 거두며 옆에 붙어있던 너의 손을 잡았다. 그때 포옹 같은 가벼운 내기 말고, 네가 머뭇거리더라도 강한 소원을 빌 걸 그랬다며 후회가 생긴다. 예를 들면, 이틀은 어림도 없고, 20년은 생각해야 옳다.) ...있잖아. (네 머리카락을 넘겨 귀가 잘 보이게 정리했다.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문을 열어주면 안 될까? (...였지.)
 
쉐리 B. 로즈:당연히 시합 해야지! 아무리 예뻐도 게임을 위한 도구인 걸. 장식품으로 쓰는 건 헌터한테 체스에서 지면.. 그렇게 될 지도? 그러니까 내가 이겨야겠지? (귓가에 닿는 숨결에 움찔, 놀랐다. 속삭인 귀를 얼른 손으로 가렸지만 얼굴은 이미 붉다.) ..헌터 유치해! 놀리기나 하고! (토라진 표정으로 혼자 후다닥 방을 나가 옆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책장이 가득한 도서관입니다.
 
문 옆에는 안내대가 있고, 책장마다 분류 팻말이 붙어 있어 어렵지 않게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안내대의 책 수레 위에는 동화책, 영웅 람피온의 다음 권이 놓여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 (하, 기분이 나아지려고 하면 끈질기게 방해하는 상황 탓에 목에 핏대가 선다.) 이상한 동화가 또, (어쩔 수 없이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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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결말입니다.
 
쉐리 B. 로즈:..행복한 이야기였네. 우리가 알던 건 잘못된 이야기였나 봐. 난 이게 더 마음에 들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인쇄된 글자를 검지로 살며시 쓸어보며)
 
헌터 버틀러:쉐리, 이 저택에서 나온 신화를 믿어? (날카롭게 가라앉은 어조가 동화를 책망한다.) 선생님이 거짓말로 적어두신 거겠지... (...) 나도 이쪽이 마음에 들긴 하지만, 믿을 수 없네.
 
쉐리 B. 로즈:(그동안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본다. 믿고 싶은 것들은 전부 거짓이었으니 이것 또한 같은 결말일 것임을 안다.) 으음.. 헌터는 거짓을 믿고 행복한 것보다 괴로워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쪽이야?
 
헌터 버틀러:(진실은 잔혹하다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기 싫은 비겁한 이들이 만든 구설수라 생각한다. 잔혹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 진실을 초래한 인간이 가장 잔혹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며,) ...거짓을 믿으면 행복해? (...) 난 지금까지 속아서 행복했던 적은 없었는데.
 
쉐리 B. 로즈:행복하고 싶어서 거짓을 믿는 거라 생각해. 비슷하지만 순서가 달라. (네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내가 헌터를 속이면 많이 슬플 것 같아?
 
헌터 버틀러:(손을 천천히 마주잡는다.) ...행복하고 싶다면, 스스로 바꿀 노력을 해야해. 만일, 거짓을 믿고... 선택을 포기했다가 다른 사람이 실수하면? 우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어. (흔한 원망도 하지 못하게 된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 너는 날 울려도 괜찮아.
 
쉐리 B. 로즈:그때 거울 속 헌터가 나한테 그랬었지. "넌 나를 영영 울리러 왔구나." 나는 헌터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방법은 배우지 않았거든. (네 손을 끌고 창가 아래 있는 빈백에 함께 털썩 누웠다.) 아마 난 너의 미뉴에트니까 평생 배우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눈물을 빨리 그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헌터가 조금만 울고 다시 웃을 수 있는 방법!
 
헌터 버틀러:비 내리는 오후는 다음 날 오전의 기쁨이야. 땅이 젖어 들어서 시원해진 숲 위에 생명이 피어나거든. 그래서 대부분, 비 오는 날을 읽어왔어. (강하게 끌어안으면 바스라질 듯한 좁은 어깨와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본다. 손으로 어깨를 덮어 느긋하게 토닥인다.) ...곧 비가 오겠네. (...) 울려도 된다니까. 울고 난 뒤에는 피어날 거야. ...하나만 약속해줘. 내가 우는 게 무서워서 도망치더라도 비가 그치면 땅에 뭐가 자랐는지 꼭 보러와. 그렇게 언제든 내게 돌아와. 울거나, 웃거나. ...뭐든 해줄테니까.
 
쉐리 B. 로즈:..비가 와도 네 옆에 계속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비가 그치지 않아도 같이 잠길 수 있게. 그럼 정말 행복할 텐데. (네 품에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 여름이 되어가는 것 같다.) 분명 예쁜 꽃이 잔뜩 자라나서 땅을 뒤덮었을 거야. 람피온도, 미뉴에트도 아닌 다른 예쁜 꽃 말이야. 그럼 돌아가면~ 그걸로 화관 만들어줘. 꽃반지도 좋아. (..) 선생님을 찾는 것도 좋지만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잠깐 잊고 조금만 나랑 놀자.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헌터 버틀러:...그래. 네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보이는 곳곳마다 꽃을 피워서 길을 만들어 줄게. 반지도 만들고, 화관이랑 목걸이도 만들자. (태연하게 훌쩍 사라질 수 있는 크기의 사람이었다. 밝은 미소로 사랑스럽게 굴면서도 꿈에 사는 것처럼 불투명했다. 돌아와주지 않으면 못 찾겠지. 온기에 집중하기위해 팔 힘을 단단히 준다.) 뭐하고 싶어? ...선생님은 언젠가 돌아오겠지. 사람이 도망만치며 살 순 없을테고... (앞날을 향한 걱정을 놓아주며 웃었다.)
 
쉐리 B. 로즈:아하하, 그렇게나 꽃이 많다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것 같아. 정말 행복한 꿈이겠네. (날 좋아하는 만큼 꽃을 준비해줘. 가벼운 농담을 하며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2층은 재밌는 게 없고.. 아, 3층에 있는 퀴즈 다시 해볼까? 옛날엔 동점이었잖아!
 
헌터 버틀러:널 좋아하는 만큼?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잠시 벌려 가늠해 보더니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라며 중얼거렸다.) 알겠어, 갈까. (한 손으로는 어깨를 남은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아 널 들어 올렸다. 가자.)
 
쉐리 B. 로즈:(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돼야 할 거야~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곧 짧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우리 아직 체스 안 했어! 안 했다고! 이건.. 반칙이야!!
 
초능력 개발/제어 활동실. 벽을 아주 두껍게 발라 방음 처리가 확실하고, 모든 마감재는 방수, 방염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바닥은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우레탄을 사용해 푹신푹신하고요.
 
퀴즈룸, 트레이닝룸, 리커버리룸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곧 졸업이기 때문일까요.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실감이 납니다. 허전하네요.
 
쉐리 B. 로즈:....(실망감에 애꿎은 퀴즈 시작 버튼만 연타한다. 탁탁탁탁탁....)
 
헌터 버틀러:(무릎을 숙여 네가 누르기 쉽게 자세를 고정하고 있다가 도로 편다.) 미술실이라도 가볼까. 거긴 쓸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쉐리 B. 로즈:이번에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전원이 안 들어오다니.. 미술실에서 종이 찾아서 빙고라도 해야 할까 봐.. (힝, 서운한 마음에 네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좀, (...) 부끄러워.
 
헌터 버틀러:어렸을 때도 정답은 없던 퀴즈 문제잖아. 또 무승부일텐데. ...종이 찾아서 체스판 그려볼 생각은 없고? (뒤통수를 쓸어주며 귓가에 웃음을 흘린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따스했다.) 여기서 나가기 전에 내려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안 떨어지잖아. 지금도 그렇고. (짓궂다.)
 
쉐리 B. 로즈:그건 어릴 때니까!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퀴즈도 그동안 정답을 찾았을지 모르는 일이잖아.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결국 정답을 영영 알 수 없게 됐어.. 체스판은 그릴 수 있어도 체스말로 쓸 수 있는게 없는걸. (화들짝 놀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널 주욱 밀어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와 입만 벙긋거렸다.) 거, 거짓말. 또 나 놀리는 거지. 내려줄 생각 없었으면서! 내가 헌터 제일 잘 알거든. 흥, 그럼 지금 내려줘봐. (투덜투덜)
 
헌터 버틀러:...딱 한 가지 명확하게 정답을 찾은 건 있어. (퀴즈가 끝나고 결판나지 않은 승부를 아쉬워하며 어렸을 때 네가 추가로 낸 질문이 있었다. 네가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한 발음으로 넌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 라고 중얼거렸다.) 이건 알겠어. 자만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어깨에 손을 감아주었다.) 미술실로 가자고 했지? 으음, 이쪽이었나... (말을 못 알아들은 척 넘겨버린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전시해두던 곳입니다.
 
빈 캔버스는 이젤 대신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고 미술 도구는 상자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렸던 그림은 모두 버린 것인지 벽면은 텅 비어있습니다.
 
쉐리 B. 로즈:그러고 보니 람피온의 저택에는 괴담이 많았잖아. 특이하게 미술실에 관련된 건 없었지 않아? 보통은 미술실이나 음악실에 사는 유령 이야기가 하나씩은 있던데.
 
헌터 버틀러:음악실 피아노가 멋대로 연주되고, 미술실의 동상이 움직이거나 그림과 눈이 마주치는 흔한 이야기? (감흥없는 듯,) ...시시해서겠지. 람피온 저택의 괴담은 독특하잖아.
 
쉐리 B. 로즈:맞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시시하다고 해서 유령이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 혹시 알아, 지금 이 미술실에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유령이 있을지. (발을 까닥거리며 빈 캔버스를 가리켰다.) 그림 하나 남기고 갈까?
 
헌터 버틀러:...괴담으로 빛을 받지 못하는 유령의 한을 대신 풀어줄 셈이야? (미술 도구가 든 상자를 한 손으로 들어 꺼내며 대답했다. 자연스럽게 너도 한 팔로 지탱해서 들게 되었다.) 뭐 그리려고. (...) ... (그리려면 내려줘야 하네, 뜸-하다.)
 
쉐리 B. 로즈:한을 풀어준다기보단-.. 우리가 떠나면 유령은 혼자 남아서 외로울 테니까 외롭지 않게 선물을 남겨주는 거지. 흠.. 유령의 친구가 되어줄 분홍색 눈의 유령? (키득거리며 머리를 기댔다. 이걸 노렸지롱! 자, 어서 자리에 내려줘야 그림을 그리겠지?)
 
헌터 버틀러:...유령이 검은 사내를 무서워하지 않고 친구로 맞이할 수 있으려나. (기분 좋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가에 입을 맞추고, 미련이 철철 넘치는 얼굴로 내려주었다.)
 
쉐리 B. 로즈:무서워하긴, 같이 새로 들어올 람피온을 깜짝 놀래킬 친구가 생겼다고 오히려 기뻐해줄 거야. (앗.. 아앗.. 겨우 바닥에 내려왔는데 그런 얼굴로 바라보면 곤란하다. 곤란하다고! 빈 캔버스 하나를 이젤에 올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그 앞에 놓인 의자에 널 앉히고 무릎 위에 앉았다. ..너는 나한테 약하고, 나도 그만큼 너한테 약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색연필 꺼내줘. 분홍색으로. (뚱한 얼굴)
 
헌터 버틀러:(눈동자를 크게 뜨고 너를 보았다. 부끄러운 얼굴을 머리카락 사이로 숨기며 시선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굴리고 있었다. 조금 고개를 기울이자 달아오른 볼이 보이는 점이 사랑스러웠다. 겨우 참아낸 마음을 다시 억누르며, 분홍색 색연필을 꺼내어 손에 올려주었다. 유령 안 사귀어도 돼, 또 너만 있으면 다 좋다는 식의 말이 나와버린다.) ...한 캔버스에 같이 그릴래? 옆에서 맞춰줄게. (조금 더 진한 색의 색연필을 꺼내 들며,)
 
쉐리 B. 로즈:좋아, 내가 그리는 유령 옆에 같이 그려줘. 흠.. (색연필을 손에 쥔 채 상체를 돌려 널 빤히 바라보다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가 그리는 검은 사내보다 내 유령을 더 크게 그릴 거야. (현실에서 따라잡을 수 없는 키를 그림에서라도 따라잡겠어. 커다랗게 유령의 둥근 머리 부분부터 그리기 시작한다. 이어 가운데보다 조금 위쪽에 색칠된 동그라미 세 개. 다리 대신 물결로 끝자락을 마무리 하면 유령의 완성. 잠깐 고민하더니 꽃도 두 송이 그려넣는다.) 어때? 친구에게 줄 선물까지 챙기는 착한 아이야.
 
헌터 버틀러:... (검은 사내를 그리기로 확정받은 그는 솜씨 좋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저택을 돌아다니며 본 작품이 많으니, 화풍을 그럴듯하게 따라 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짙은 색의 선을 죽 긋고 일직선으로 선 사내와 그 옆에 정성을 불어넣은 여인을 그렸다. 개성은 없지만 잘 그린 그림이었다. 편파적인 마음이 드러나긴 했어도.) 잘 그렸네. (동그랗게 그려진 유령을 본다.) 이건 무슨 꽃이야? ...우리 둘에게 꽃을 챙겨주는 친구가 생길 줄은 몰랐어. 기쁘다고 할지...
 
쉐리 B. 로즈:(네가 그린 그림과 자신의 그림을 번갈아 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제대로 그렸지!) 거짓말, 헌터의 그림에 비하면 낙서 같은걸. (네가 대충 그린 검은 사내보다 한참 아래다. 힝) 코스모스야. 분홍색이랑 하얀색이 있는데, 밖에서 가장 흔하게 피는 꽃이라고 책에서 봤어. 밖에선 흔해도 이 저택에선 볼 수 없는 꽃이니까 좋아해줄 것 같았어. (색연필을 내려두고 손을 털고는 네가 다시 들어올리기 전에 후다닥 교실로 도망갔다.) 빨리 와!
 
교실
 
" 선생님! 헌터 저기 있어요! "
 
문을 열자마자 땡땡이 친 짝꿍을 일러바치는 게일의 얄미운 목소리가 왱왱거리며 울립니다.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의 시선이 집중된다고 느꼈을 때, 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면 평범하게 빈 교실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게일은 결국 빈 교실에서 눈을 감았고, 이건 환청일 뿐이니까.
 
19살이 되지 못해 스러진 람피온의 망령이 교실에 남기라도 한 걸까요.
 
아무리 교실에 있어도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은 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올 것은 쉬는 시간이 아니라, 졸업식인 걸요.
 
쉐리 B. 로즈:헌터, 헌터. 자리에 앉아봐. (또 무슨 꿍꿍이인지 장난기 가득했다.)
 
헌터 버틀러:...그래. (무슨 짓일지 의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 앉았다.)
 
쉐리 B. 로즈:(네가 자리에 앉자 재빨리 그 뒷자리에 앉았다. 싱글벙글 웃으며 검지로 등에 글자를 하나씩 적었다. '헌터 바보~') 뭐라 적었는지 맞춰봐!
 
헌터 버틀러:(간질간질한 손길이 등을 쓸어내린다. 흥미와 즐거움이 담긴 눈으로 앞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들리는 게일의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헌터... (잠시 고민한다.)
...부부? (일부러 이런다. 백퍼센트.)
 
쉐리 B. 로즈:... .... 땡! 바보! (이중적인 의미다. 자리에서 일어나 네 앞으로 위치를 옮겨 뒤돌아 앉았다.) 옛날에도 장난을 안 친 건 아니지만 이젠 맨날 날 놀리는 것 같아. 난 아들 이렇게 키운 적 없는데~ (농담)
 
헌터 버틀러:...그래? 대부분 진심인데.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유롭게 행동하고 있지만 환각이 맴도는 교실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부끄러운 아들이라도 끝까지 책임져주세요. ...이제 어디에 가고 싶으십니까?
 
쉐리 B. 로즈:(진심이라니? 뭐가??? 뭐가 진심인지도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눈 앞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씩씩거리며 널 따라 일어났다.) 부끄럽다니, 장난을 많이 치긴 하지만 그래도 자랑스러운 아들인데. 이제 이 엄마는 아들이 예쁜 여자친구만 데려오면 소원이 없겠어~ (교실 밖으로 나가려다 걸음을 멈추고 칠판 앞으로 가서 무언가 끄적이더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다시 나갔다.) 다락방으로 갈까? 거울 속 헌터에게도 인사하고 싶어. 그래도 꽤 자주 본 사이니까 그게 예의인 것 같아.
 
헌터 버틀러:아들이 멀대만 그럴듯하지 인기 많은 성격이 아니라 오래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어필도 못하는 중이라서요. (칠판의 글씨가 보일락 말락 하여 인상을 쓰고 고개를 내민 채 바라봤다.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어본다.) ...아직 있을까? 모두가 떠나는 때에 그것이라고 떠나지 말란 법 없지. 자유를 찾아 가버리면 좋을 건데, 나처럼 생겨서. (...) 갇혀있는 걸 보기가 불편해. (따라가면서,)
 
칠판에 적힌 하나의 문장은 단순명료했습니다.
 
'좋아해, 헌터!'
 
말린 장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거울 속 헌터는 텅 빈 등을 들고 있었으나……. 눈이 마주친 순간 바닥에 내던집니다.
 
소리 없이 박살 난 등이 바닥에 흩어진 가운데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핏방울이 닿은 바닥은 새까맣게 부식되며 흐린 연기를 피워올립니다.
 
쉐리 B. 로즈:(..오늘도 딱히 친절해 보이진 않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을까.) 안녕, 헌터. 음.. 우리 이제 안 올 거야. 마지막이야! (같이 인사하라는 듯 옆구리 쿡쿡)
 
헌터 버틀러:(한숨을 쉬고 적당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발아래에 까맣게 퍼진 핏자국으로 시선을 옮겼다.) ...등 안에 시체라도 숨겨뒀나. (...)
 
쉐리 B. 로즈:헌터! (그런 말 하는거 아냐! 재빨리 손으로 네 입을 막았다.) 흠흠, 어쨌든!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왔어. 넌 우릴 싫어했을지 몰라도 난 친구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이쪽에 있는 헌터가 너도 자유롭게 떠났으면 좋겠대! 여기 혼자 있는건 외롭잖아. 이제 우리도 없구. 좋은 곳으로 성불하는 게 어때?
 
거울 속 헌터는 쉐리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한심하다는 얼굴로 거울 밖 두 사람을 응시합니다.
 
쉐리 B. 로즈:..헌터, 뭔가 더 할 말이 없을까. 나 저 친구는 어려워... (슬쩍 네 뒤로 숨어 널 앞세웠다.)
 
헌터 버틀러:...나랑 똑같은 성격인데. 왜 어려워? (이해하지 못해 질문하면서도 팔을 잡아당겨 등 뒤에 숨겨준다.) ...이번에는 도움 될만한 힌트 없어? 종종 줬잖아. 선생님의 위치라던가...
 
쉐리 B. 로즈:달라! 이쪽의 헌터가 훨씬 다정하고 날 좋아해줘. 거울 속 헌터는.. 헌터인데 헌터가 아닌 것 같아. (고개만 빼꼼 내밀어서 본다.)
 
거울 속 헌터는 대답 없이 창밖을 가리킵니다.
 
그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분수대가 있습니다.
 
봄의 가뭄은 분수대의 물을 전부 말려, 바닥이 드러난 상태입니다.
 
마지막 힌트를 준 거울 속 헌터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사라집니다.
 
이제 거울 속엔 아무것도 없어요.
 
헌터 버틀러:... ...저 분수대로 가봐야할까?
 
쉐리 B. 로즈:어차피 더 이상 저택 안에서 둘러볼 건 없으니까 나가보자! 거울 속 헌터는 항상 도움을 줬으니까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 힐끗 보고) ..정말 성불한 걸까?
 
헌터 버틀러:쉴 공간으로 간 거야. 늘 멋대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는 했으니까. (거울 너머에는 미지의 드넓은 공간이 있기를 기도해줬다. 허리를 펴며 마른 공기를 마신 그는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 저택의 대문을 열었다.) ...성불했어도 좋은 일이지. 거울 안에만 있어서 좋을 거 없어.
 
선생님을 찾아 저택을 헤맨 후 남은 것은 정원뿐입니다.
 
정원의 구조는 예전과 같습니다.
 
바짝 건조한 봄 공기, 생생하니 선명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지나갑니다.
 
계절이 바뀌며 가뭄이 시작된 것처럼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죠.
 
세계에 둘만 남겨진 기분입니다.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은 탓일까요?
 
정원의 분수대는 어느새 물이라곤 온데간데없고, 바닥을 채운 조약돌과 동전들만 반질반질합니다.
 
여느 때의 물소리 대신, 낮게 울리는 소리가 조각된 고래의 숨구멍을 타고 바깥으로 빠져나옵니다.
 
얼핏 들으면 고래가 우는 것 같기도 하네요.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99
판정결과: 실패
 
분수대의 둘레를 따라 고래가 헤엄치는 바다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너울치는 파도는 꼭 계단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층이 나눠진 상태입니다.
 
헌터 버틀러:특별한 점은 안 보이는데... (조각된 파도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바라보았다.)
 
제일 높은 곳에서부터 제일 낮은 곳까지. 파도의 개수를 세면 정확히 36개입니다.
 
마지막 파도가 새겨진 대리석은 반질반질하니 표면이 닳아있습니다.
 
자주 밟거나…… 누른 것처럼.
 
헌터 버틀러:(저택의 36번째 계단을 밟으면 죽는다, 그리고 분수대 아래에는 고래가 살고 있다. ...계단을 밟은 이는 바다신의 노여움을 사서 재물로 바쳐지는 구조일까. 파도가 다리를 휘감아 무거워지는 착각을 느끼며 마지막 계단을 세게 밟았다.)
 
계단을, 아니. 파도의 36번째 칸을 밟자,
 
움푹. 파도가 안으로 들어가고…… 무거운 소리와 함께 분수대의 기둥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모세가 갈랐다던 홍해 대신 고래의 배가 좌우로 나뉘고, 조약돌과 동전들이 이리저리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분수대의 벌어진 틈 사이로는 계단이 보입니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통로는 사람 하나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데다 퍽 어둡습니다.
 
어떤 광원도 존재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조약돌만 햇볕에 희미하게 반짝입니다.
 
저택에 이런 비밀스러운 입구가 존재할 일이 무에 있을까요.
 
우웅, 우우웅.
 
문이 열리자 고래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선명해집니다. 정확히는……
 
헌터 버틀러: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32
판정결과: 보통 성공
 
기계, 컴퓨터 따위가 웅웅거리는 구동음 같습니다.
 
계단 아래에서부터.
 
쉐리 B. 로즈:세상에... (놀란 표정으로 눈만 끔벅였다. 10년 동안 정원에서 놀면서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저택도 잘 살펴보면 변신하는 버튼이 있는 거 아닐까? (소곤..)
 
헌터 버틀러:...이래서 분수대 아래에 고래가 산다는 소문이 퍼진 거였어. (괴담은 실상을 파헤치면 무례한 관객이 밝혀낸 마술 트릭과 다르지 않다. 착각, 인간 심리가 만든 타올랐다가 사라질 이야기다. 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찾으면 눌러봐. 저택이 거대한 람피온 모양으로 바뀔 테니까. (...) 내려가 볼까?
 
쉐리 B. 로즈:음, 너무 넓어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것도 이제야 겨우 알게 됐는걸! (어두컴컴한 통로를 내려다봤다. 어디까지 이어진거지?) 그.. 레, 레이디 퍼스트? 아니, 헌터 퍼스트... (뒤로 숨기)
 
두 사람이 내려가기 시작하면 금세 빛이 닿는 곳은 끝나고 사위로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벽에 기대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납니다.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은 곳임이 분명합니다.
 
다리가 여럿 달린 벌레들이 샤샤샥, 벽을 타고 기어 다니는 소리가 납니다.
 
목덜미에 부드러운 실이 닿습니다. 희게 떨어진 거미줄입니다.
 
돌을 깎아 만든 계단은 꽤 투박합니다.
 
지하실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걸까요?
 
벌레와 먼지, 곰팡내에 쌓여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내려오면……
 
차가운 벽이 길을 막고 딱 세워져 있습니다.
 
탁. 헌터와 쉐리가 마지막 걸음을 딛는 순간 소리소문없이 벽 좌우에 걸린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벽에는 키패드가 함께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빈칸에 들어갈 글자가 암호인 것 같습니다만……. 뭐라고 입력해야 하지?
 
헌터 버틀러:아무래도 거울 속 내가 준 힌트는 분수대만이 아니었나봐. (눈앞의 덤덤한 청년이 바닥으로 낙하시키던 물건을 떠올렸다. 키패드에 손을 뻗는다.) ... (예비하신 을 들고 향기로운 기름을 채워 세상 끝까지 밝힐지어다.)
 
키패드에 등과 기름을 입력하자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립니다.
 
문 너머로 펼쳐지는 것은…… 연구실이라고 불릴 법한 공간이에요.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의자와 책상 위에 널브러진 이면지. 곳곳에 소복하게 쌓인 먼지까지.
 
쓰인 흔적이 없군요. 꼭꼭 숨겨 두고선, 결국 버린 걸까요?
 
하지만 전기 공급만은 끊이지 않았는지, 천장과 바닥이 배선으로 어지럽습니다.
 
웅웅, 땅을 울리던 고래의 울음소리는 아마 분수대의 배관을 타고 올라온 기계의 구동음이었던 모양입니다.
 
양편에 꽂힌 책장은 거의 비어있고, 책상마다 컴퓨터를 들어냈는지 위가 휑합니다.
 
가장 안쪽에 커다란 스크린이 흘러 내려와 있습니다.
 
화이트보드에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휘갈기다시피 한 글씨체로 쓰여 있고요.
 
그다지 쓸모는 없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무엇이라도 건질 수 있겠죠.
 
그래야만 할 것입니다.
 
헌터 버틀러:선생님. 이 뒤에 계십니까? (주변을 쭉 둘러보다가 책장으로 향한다.)
 
표지가 상당히 낡은 책. 양피지를 엮어 만든 것으로 제대로 된 제목도 없습니다.
 
그러나 헌터에겐 분명히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이미지
 
꿈 속의 비석에서 읽은 이야기와 같습니다.
 
마지막 장에
 
당신의 이름이 남겨져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 불을 주고, 낮과 밤을 만들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면... 배가 터지도록 채운 위선 끌어안고 하늘에서 떵떵거리며 살 것이지. 어찌 신은 인간에게 일부를 보여주며 자랑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지? 람피온이 세상에 내려온 이유를 모르겠다. 신의 일부, 재능을 받은 아이들. 잠시 침묵하던 입가가 비틀어져 말려 올라갔다. 네가 네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인간세 집처럼 드나들지 말고 우주에서 없는 것처럼 쉬기를. 책을 덮으며 미지에게 말을 걸었다.)
...이건 볼 수 있는 걸까? (스크린에 다가갔다.)
 
영사기에서는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옵니다.
 
빛의 범위를 따라 흔들리는 먼지와 작은 알갱이들이 꼭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맺혀있지 않지만, 재생 버튼을 누르면 영상이 시작됩니다.
 
재생하는 순간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모독적인 찬송가.
 
제대로 발음할 수조차 없는 주문 따위.
 
영상 속에 어떤 남자가 묻습니다.
 
" 이렇게 외우면 돼? "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 응, 포말하우트에 사시는 분이니까 꼭 그 별이 나무들의 가지 끝에서 빛날 때 외워야 해. "
 
아, 익숙한 얼굴이에요.
 
지금보다 천진난만하게 웃던 선생님이 말꼬리를 흐립니다.
 
" 역시 나도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 신도인 당신이 부르면 지나친 권능이 임할지도 모른다면서. "
 
" 그래도. 그 분을 소환하는 의식을 치른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 불안해. "
 
" 괜찮을 거야. 금방 돌아올게. "
 
선생님은 남자에게 작은 주머니 부적을 건넵니다.
 
몸 조심히 돌아오라고, 그 분을 영접하더라도 미치지 않도록 주문을 걸어뒀으니 꼭 가지고 다니라고…….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선생님의 뺨에 입을 맞추곤 떠났습니다.
 
영상 속에선 분주히 열 명 남짓의 연구원들이 짐을 챙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 릭 호수, 은가이 숲으로 갑시다. "
 
영상은 금세 끝납니다. 화면 끄트머리에 날짜가 쓰여있습니다.
 
익숙한 날짜와 지명이에요.
 
헌터 버틀러:하...... (어이없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에 선 너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잠시간 길게 호흡했다. 멍청함은 오래 보면 옮는 경우도 있다던데, 네가 혹여 저들의 무지에 동요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 안타까운 일은 안 되지, 이마를 비빈다.)
 
쉐리 B. 로즈:(스크린에 남은 글자를 몇 번이고 눈에 새기다 이어진 네 행동에 어색하게 널 안고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지하라 답답해서 그런가? (고개를 슬 기울여 걱정스레 네 안색을 살피다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헌터 버틀러:(숨을 고르며 상대의 작은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아니. 이상한 걸 너무 많이 봤어. 쉐리, 고마워. (곧 자세를 정리한 후 옷소매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저긴 또 뭐가 적혀있을지... (화이트 보드를 살핀다.)
 
화이트보드의 글씨는 드문드문 지워진 데다 휘갈겨 쓴 탓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커다란 지도가 한쪽에 붙어 있습니다.
 
헌터 버틀러:... (찡그리며 글씨를 읽어보려 노력했다.)
 
헌터 버틀러:
언어(모국어)
기준치: 70/35/14
굴림: 78
판정결과: 실패
 
■어붙은 세계, ■■, 크■가 소환, 은가이 숲, 릭 호수, 1941. 6. 1…….
 
나열된 글씨를 차근차근 읽어도 정확히 무엇을 위함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헌터 버틀러:(시시한 정보겠거니, 미련없이 지도로 시선을 옮긴다.)
 
미국의 지역을 그려둔 지도.
 
은가이 숲과 릭 호수에 커다랗게 붉은 동그라미가 매겨져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X자가 보이고요.
 
……아마도 X자는 출발 지역일 테니, 람피온의 저택이겠죠.
 
이렇게 가까웠던 걸까요? 걸어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월 29일에 떠난 남자. 5월 30일에 찍은 호수의 사진.
 
그리고 6월 1일 이후로 남지 않은 기록.
 
선생님이 어디로 갔을지 알 것 같습니다.
 
헌터 버틀러:...이 호수 깊었던가? (너에게 아슬아슬하게 안 들릴 작은 목소리로 섬뜩히 중얼거렸다.) 선생님, 호수에 가셨나봐. 쉐리. 우리도 가보자.
 
쉐리 B. 로즈:괜찮을까? 우리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는데.. (조금 걱정되는지 네 손끝을 살짝 붙잡았다.)
 
헌터 버틀러:괜찮아. 선생님을 찾으러 가는 거고... 곧 나갈 거잖아, 연습한다고 생각해. (너를 달래는 표정이 부드럽다. 구태여 위험한 곳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지만, 두고 갔다가 후회하기가 싫었다. 어김없이 허리를 끌어안아 올린다.)
 
쉐리 B. 로즈:..그래,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헌터가 같이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대신 손잡고 나가.. (또, 또 발이 공중으로 뜬다. 헌터는 날 커다란 인형 정도로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내가 인형이면 인형을 안고 다니는 넌 10살 어린애다!) ..내려주고 손 잡고 가! (버둥버둥)
 
헌터 버틀러:지금도 충분히 붙어있는데 손까지 잡을 필요 없지. (고개를 올려 불퉁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바라본다. 의미심장하게 입 끝에 힘을 주다가 약간 몸을 숙였다. 곧 너의 발이 땅에 닿는다.) ...움직이면 위험해. 알았어, 손잡고 가. (꺼림칙한 장소에서 싸울 생각은 없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정원의 대문은 선생님의 방문과 마찬가지로 약간 열려 있습니다.
 
억지로 연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안에서부터 열쇠를 사용해 열었단 뜻이겠죠.
 
헌터가 미뉴에트 나무를 뿌리째 불살랐으니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검은 나무가 춤추는 숲. 하나의 발자국이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간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태는 검은 나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탄내가 지독하게 느껴집니다.
 
색이 검은 것이 아니라 모조리 타고 남은 잔해처럼.
 
지도를 본 덕에 길을 잃지 않습니다.
 
왼쪽으로 한 바퀴, 오른쪽으로 두 번 돌고, 직진해서 몇 분 더.
 
숲은 깊고 어느새 시간은 밤을 향합니다.
 
하지만 숲에는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보라색으로 저무는 붉은 하늘만이 세계의 유일한 색채입니다.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탄내가 납니다.
 
검은 나무는 멀쩡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이파리 없는 앙상한 가지에 하늘이 조각조각 걸려있습니다.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판정에 실패하더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눈치챌 수밖에 없습니다.
 
꿈에서 본 그 숲이란 걸 깨닫습니다.
 
검은 숲을 가로지르다 보면, 날이 점점 차가워집니다.
 
5월 31일. 봄의 끝물과 여름의 초입.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찬 공기가 확 밀려옵니다.
 
람피온의 저택은 숲속에 있어 여름에도 서늘했습니다만,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이가 부딪히는 딱딱한 소리가 납니다.
 
쉐리 B. 로즈:...엣취!
..흠흠, 담요라도 챙겨올걸. (아무 일 없었던 척)
 
헌터 버틀러:지금이라도 가져올까? (네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물었다.)
 
쉐리 B. 로즈:아냐, 이미 많이 걸어왔는걸. 이러고 있으면 하나도 안 추워. (네게 슬 기대며 미소지었다.) ..추워서 그런가, 헌터가 평소보다 더 따끈따끈한 것 같아. 헌터는 안 추워?
 
헌터 버틀러:아까는 걷기 불편하다고 계속 투덜거렸잖아. 이제서야 내가 필요해졌어? (가볍게 탓하는 장난스러운 말이 서서히 잦아든다.) ...안 추워. 그건 그렇고 날씨가 스산해. 이런 날씨가 찾아올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무슨 일이지?
 
쉐리 B. 로즈:윽.. 불편했던 건 아니야. 무거워서 헌터가 힘들까 봐 걱정돼서 그랬던 거지. ..그래서 싫어? (부빗..) 아직 완전한 여름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그런가 봐. 아, 비가 내릴 거라고 했었지? 어쩌면 그것때문일지도 몰라. (...) 우산도 없는데 큰일이네!
 
헌터 버틀러:넌 무겁지 않다니까. 가벼워서 문제지. ...잘 챙겨 먹었으면서 전부 어디로 간 거야? (싫지 않아, 자동으로 튀어나온 반응에 자신도 약간 놀랐는지 몇 초간 정적했다. 팔과 네 몸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아니. 그렇다기엔 숲에서 타는 냄새도 났잖아. 불이 났으면 당연히 뜨거워야 하는데, 여긴 이상하게 차가워. ...경계하며 가자. (앞으로 더욱 나아간다.)
 
어둠이 내려앉는 겨울의 숲. 헌터와 쉐리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천천히 걷습니다.
 
……이런 적이 또 있었던 것 같아요.
 
10살의 여름에도 세상을 메꾼 어둠을 둘이서 나란히 가로지르고 있었죠.
 
심해의 지저를 밝히는 아귀의 초롱처럼 작은 불빛이 아롱거립니다.
 
파도 대신 거센 바람이 치면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몸을 흔들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떠미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이끌리는 기분이에요.
 
헌터는 쉐리와 함께, 걷고 걷습니다.
 
완전히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을 때…… 두 사람은 호수에 도착합니다.
 
주위로 검은 나무들이 산재한 가운데 바닥에는 검붉은 꽃들이 버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선생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헌터 버틀러:...이 밤 중에 수영을 하진 않을 건데. 어디가셨을까... (고개를 기울이며 눈동자를 호수 쪽으로 굴렸다.)
 
완전히 얼어붙은 호수는 유리 같기도 하고 거울 같기도 합니다.
 
헌터는 이제 이 호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릭 호수입니다.
 
1941년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어느 숲의 그 호수 말이에요…….
 
짙은 물색,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하는 달빛에 반사되는 물의 표면.
 
호수는 깊고 넓어 도저히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어둠, 무저갱, 심연.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을 뿐.
 
헌터 버틀러:(물결에 둥그렇게 깎인 돌덩이를 들어 호수 쪽으로 던진다. 퉁, 퉁, 퉁... 물살 찢는 소리를 내며 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 (나무에 숨었나, 검은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빛을 통과시키지 않을 듯 빽빽하던 나무들은 호숫가에 다다르자 마르고 앙상해선 듬성듬성 구색을 갖춘 게 전부입니다.
 
헐벗은 가지에는 새하얗게 눈발이 쌓여있습니다. 죽을 때를 앞둔 노인의 머리카락처럼 희끗희끗하군요.
 
헌터가 나무를 살펴보면 가지마다 등롱이 하나씩 걸려있습니다.
 
헌터 버틀러:(손가락으로 성의없이 툭, 건드렸다.)
 
검은 등롱에는 불꽃의 너울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유리 너머에서 끊임없이 환한 빛을 품은 채 타오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람피온입니다.
 
람피온, 당신의 또 다른 이름.
 
저택의 정원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하나 전혀 다른 꽃입니다.
 
겹겹이 쌓인 꽃잎은 안에서부터 불을 켠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내부의 금술은 떨어지는 노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아. 헌터는 이 색을 본 적이 있습니다.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
 
정오의 태양, 꺼지지 않는 불꽃, 가장 밝고 위험한 색.
 
람피온의 씨앗과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잖아요.
 
불타는 광경처럼, 떨어지는 노을처럼!
 
이런 꽃은 생전 본 적이 없습니다. 등롱 근처에만 다가가도 열기가 느껴집니다.
 
열다섯의 꿈, 부쩍 가까워졌던 태양도 이보다는 덜 뜨거웠던 것 같아요.
 
그러나 등롱에 손을 대면 딱 좋은 온도가 느껴집니다.
 
사람의 피부처럼 적당하고 부드러운 온도…….
 
정확히 37.5℃, 람피온의 체온입니다.
 
호수를 둘러싼 테두리마다 같은 형태의 등롱이 걸려있습니다. 안에는 모두 람피온이 만개했고요.
 
완전히 펼쳐졌으니 이제 남은 건 시드는 일뿐이겠죠.
 
헌터 버틀러:(황금빛이 일렁이는 역겨운 등롱이 믿어지지 않는 듯, 한참을 숨소리도 없이 바라보았다. 희미한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첫 번째 등롱을 잡아 내리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대신 걸어두면 어떨까, 누구도. 다시는. 줄곧 여기를 밝힐 생각을 하지 못하게... 자신의 손에서 빛나는 등롱을 바라보다가 나무를 향해 던져버린다. 깨진 유리 사이로 나온 람피온을 조심스럽게 줍는다.) ...사라. (그리고 게일. 이름 한 마디 부를 때마다 철로 만들어진 물건이 망가지는 소리가 난다.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너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올리버, 리샤이. 등롱을 빙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신, 래리.) ...쉐리. (흔들리는 눈이 너를 향한다.) 여기 버려진 꽃들, ...뭔지 알겠어? (검붉은 꽃들로 고개를 떨군다.)
 
어느덧 노을은 다 지고, 밤이 찾아온 탓에 바닥에 떨어진 꽃은 색을 알아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검붉다기보단…… 검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하지만 꽃의 이름만은 모를 수 없습니다. ……람피온입니다.
 
시들고 말라, 빛이 꺼진 꽃.
 
다락방에서 보았던 그 꽃무더기에 쌓여있던 것들이 지금 이 차고 마른 숲에 버려져 있습니다.
 
숲의 정경을 보자니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얼어붙은 세계, 멸망, 크투가 소환, 은가이 숲, 릭 호수, 1941. 6. 1,
 
영웅의 신화와 열 살을 넘긴 람피온을 찾아볼 수 없는 거리.
 
잠자코 곁을 따르던 쉐리가 말을 꺼냅니다.
 
쉐리 B. 로즈:어떻게 모르겠어. 거의 시들긴 했지만 람피온이잖아. (람피온에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너만을 가만히 응시했다. 서글픈 목소리와 달리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 애들은 아니야. 그 아이들은 피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람피온이겠지.
 
헌터 버틀러:(침묵을 유지한채 너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슬픔이 깃든 표정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죽었는지, 죽였는지 모르는 일이야. 선생님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상한 짓을 했잖아. (...) 뭐든, 람피온을 데리고 기분 나쁜 일을 벌여뒀어. 멸망, 얼어붙은 세계? ... ...멸망하면 어때서,
 
쉐리 B. 로즈:(뭐라 답해야 할까.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혼자 묻고 또 물었던 질문이었지만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결국 속에 담아둔 것들 중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집요한 네 시선을 피했다.) ..이 호수 너머에는 겨울이 있대.
 
추상적인 표현입니다.
 
숲의 너머를 노려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이질적인 분홍색.
 
쉐리 B. 로즈:세계가 얼어붙기 시작한 지점이래, 1941년보다 훨씬 전부터.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더니 바람이 차게 변하고, 기온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거야…… 끝나지 않는 겨울이 시작될 조짐이었고, ..겨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이야기를 마친 쉐리는 헌터를 돌아봅니다.
 
심리학 판정 따위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울지 않기 위해 쉐리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쉐리 B. 로즈:너는 오늘 죽어, 헌터.
 
쉐리는 눈물 대신 고개를 떨군 채 얼어붙은 호수의 깊은 곳을 노려봅니다.
 
쉐리 B. 로즈: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수많은 과학자와 연구원들이 달라붙었지만 해결 방법을 찾지 못했어. 다가오는 계절 앞에 인간은 무력하니까. 그러다 크투가를 알게 된 거야.
 
살아있는 불꽃, 꺼지지 않는 태양, 불의 흡혈귀. 외계의 모독적인 신의 이름입니다.
 
쉐리는 잠자코 설명을 이어갑니다.
 
쉐리 B. 로즈:크투가를 소환해서 끝없는 겨울이 호수를 넘어서 모든 걸 얼리기 전에 막으려고 했대.
 
영상 속 사람들의 얼굴이 스칩니다. 선생님과 주고받던 대화들도.
 
쉐리 B. 로즈:포말하우트가 나뭇가지 끝에서 빛나는 밤. Rose는 겨울이 임하는 근원지, 은가이 숲으로 향했고 크투가를 불렀어.
의식은 성공했어. 대신.. 크투가는 기꺼이 부름에 응답하는 대신, 숲을 전부 태워버렸대.
람피온은 그날 이후, 크투가가 지구에 남긴 계약의 증표야. 겨울을 물리치기 위해, 하지만 모든 것을 태워버리지 않게끔 얇은 껍질 속에 가둬진 채로 태어나서... 10살에 개화해 19살에 죽은 불꽃이 되어 세상을 지피는 식으로.
 
가지 끝에 매달린 등롱 안에선 아직도 람피온이 타들어 갑니다.
 
자신의 본질과 결말을 본 헌터, 이성 판정(0/1D3)
 
헌터 버틀러:
SAN Roll
기준치: 45/22/9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변동 없음
 
이미지
 
쉐리의 말은 이어집니다.
 
쉐리 B. 로즈:하지만 괜찮아. 내가 헌터를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아주 옛날부터 약속했는걸.
 
툭, 투둑. 얼어붙은 땅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쉐리 B. 로즈:그러니까 헌터, 부탁이야.
 
가까이 다가온 몸은 평소보다 더 서늘하고 향기롭습니다.
 
미뉴에트 특유의 단내. 정신을 흔들어 놓고 마음을 잡아당기는 매혹.
 
쉐리는 언제나 헌터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좁은 저택, 짧은 하루에서 공백이라곤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터 숨겨왔던 비밀인지 모르겠습니다.
 
헌터가 모르는 사이, 쉐리가, 이런 걸 알게 될 틈 따윈...
 
쉐리 B. 로즈:내게 입 맞춰줘.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 헌터는 이레의 열병을 떠올립니다.
 
유일하게 쉐리와 헤어져 있던 나날. 사흘을 들여 헌터를 구하러 왔던 쉐리.
 
그때 쉐리는 분명히,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쉐리 B. 로즈:내가 널 전부 훔칠 수 있도록.
 
열다섯 번째 여름, 람피온의 저택에 또다시 열병이 닥친다.
 
쉐리 B. 로즈:곧 깨어나겠죠?
 
선생님:…….
 
쉐리 B. 로즈:왜 대답을 안 해주시는 거예요?
 
선생님:아마, 헌터는 건강했으니까, 아마도……
 
헌터의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쉐리를 보며 선생님이 물었다.
 
선생님:헌터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쉐리가 열병으로부터 헌터를 구해내는, 한편의 예언.
 
쉐리는 선생님에게 람피온이 5년 주기로 긴 열병을 앓고, 열아홉 번째 여름에 찾아오는 마지막 열병의 치사율이……
 
선생님:람피온은 어른이 될 수 없어요.
 
100%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황망한 시선을 마주하며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선생님:헌터를 구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신을 모시는 마녀예요. 람피온의 탄생과 동시에 어떤 미래를 읽었죠. 은가이 숲을 잃은 기어드는 혼돈이 원한을 품고, 불꽃을 훔치기 위한 어떤 수단을 만들어낼 거라고. 그리고 그건…… 단 한 번뿐인 기회란 걸.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어떤 불길한 예감이 다가왔다.
 
불꽃을 훔치기 위한 어떤 수단, 그리고 단 한 번뿐인 기회.
 
불길한 예감이란 어쩜 이렇게 비껴가는 법이 없는지. 라이아는 덤덤하게 설명했다.
 
선생님:크투가는 세계를 구하는 대가로 은가이 숲을 잡아먹고, 람피온을 낳았어요. 그리고 이 숲 전체를 계승자들을 가둬두기 위한 저택으로 삼았죠.
 
살아있는 불꽃, 꺼지지 않는 태양, 불의 흡혈귀이신 크투가를 섬기는 마녀는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선한 과학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멍청하고 오만했다. 불신자가 그를 소환하면 지배력을 덜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오만의 대가는 뼈아팠다. 연인을 잃었고, 이 숲에 발이 묶였다.
 
지존하신 이의 강림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원망한 대가로 열아홉 번째 여름을 맞고 스러지는 꽃을 거두는 업이 주어졌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이야기를 마친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 차마 쉐리를 바라볼 수 없다는 듯.
 
선생님:내가 왜 수상쩍은 당신을 내내 헌터의 곁에 뒀다고 생각해요?
유일한…… 생존수단이라서예요.
미뉴에트는 람피온의 능력을 완전히 훔칠 수 있어요. 그러면 적어도, 헌터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원하지 않는다면 깨우지 않아도 좋아요.
 
작은 목소리가 위태롭게 속삭였다.
 
선생님:당신의 생명이, 헌터가 죽은 후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간은 흘러 다섯 번의 여름을 더 보내고, 1996년 5월 31일.
 
그동안 당신의 옆에서, 나는...
 
쉐리가 헌터의 입을 맞추자 파도처럼 기억이 밀려듭니다.
 
쓸쓸해 보이던 선생님의 옆얼굴, 열에 들떠 깨어나지 못하던 헌터, 나날이 죽어가던 람피온들, 그리고……
 
열다섯부터 열아홉까지. 하나의 미래를 삼킨 채 헌터를 지켜보던 쉐리.
 
타인의 기억과 감정이 분명한데도 원래 헌터의 일부인 것처럼 끊임없이 밀려오고, 스며들고, 흘러듭니다.
 
아, 그래요…… 쉐리의 근원은 헌터이기에, 모든 것은 결국 헌터에게 돌아올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헌터에게 내일은 없을 겁니다.
 
허락되는 것은 쉐리의 목숨을 대가로 한 헌터의 내일 뿐.
 
이건 누구의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기록.
 
언젠가 들었던 노랫말이 머릿속을 뒤흔듭니다.
 
장미 향기가 진동하는 숲속, 탄내도 불티도 없건만 한여름의 장미는 이토록 강렬하게 존재를 증명합니다.
 
쉐리는 그저 담담한 얼굴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 떨기 꽃으로 바꾸어 놓는 것에, 어떤 부당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이별을 오래도록 준비한 사람 특유의 초연함이 베어있습니다.
 
헌터 버틀러:(곧 너에게서 돌아선 그는 등롱에서 빼낸 람피온을 나무 아래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 위에 걸려있던 반짝이는 황금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영원한 어둠처럼 밤이 찾아온 호수도, 나무의 탄내가 옷에 스며들 때까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 죽음은 슬프지 않았다. 기실 예상한 결말이었다. 첫 만남, 그 이후. 또 이후에도 미뉴에트는 꽃잎을 뜯어 사람을 살리기 급급했다. 네가 홀연히 떠나도 놀랍지 않아, 한껏 떨리는 입술이 겨우 문장을 만들었다.) ...살면 돼? 그러면 네가 만족할까. 쉐리, 슬퍼하지 마. 나를 울려도 된다니까. 넌 세계에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잖아.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원하는 거 뭐든 해도 괜찮아. (호수 아래를 바라보는 눈이 반으로 접힌다. 다만 이토록 죽을 기분이 드는 이유는, 나의 착각 때문이었다. 너도 ‘헌터 버틀러’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면서 살았어. 보란 듯이 오답을 낸 퀴즈 문제를 떠올리며 그대로 너의 볼을 토닥이며 천천히 쓸어내린다.) 괜찮아. ...그렇지?
 
쉐리 B. 로즈:(겨우 토해낸 진실은 예상했던 만큼 격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르기까지 걱정했다. 네가 울면 어떡하지. 네가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하지만 넌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한없이 고요했다. 오히려 그 아래 깊이 가라앉는 것처럼 숨이 막히는 것은 이쪽이었다.) ..나도 내가 어떤 걸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 처음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만들어진 운명이니 바꿀 수 있을 리가 없다고. 그래도 헌터가 살아갈 수만 있다면, 어차피 네가 준 생명으로 널 살리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 생각했지. 나에겐 처음도 아니니 어려운 일도 아니야. 헌터가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아간다면 내 생은 그걸로 가장 큰 가치를 가지게 되는 건 줄 알았어. (느껴지는 온기에 기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건 오롯이 나만이 감당해야 할 몫임에도 자꾸만 마음이 흔들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동화책에선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해내고 나면, 둘이서 함께 행복했잖아. 우리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난, 너와 함께 행복하고 싶었던 거지. 영웅 같은 게 되고 싶었던 게 아닌데.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과는 다른 것이 뺨을 타고 흐른다. 너와 달리 그것은 뜨겁지 않다.) 어떡하지, 헌터. 나 안 괜찮은가 봐. 죽고 싶지 않아. (끝내 숨겼어야 할 이기적인 진심은 결국 결말을 앞두고 쏟아져버렸다.)
 
헌터 버틀러:(눈웃음을 짓던 얼굴이 서서히 탈력으로 변한다. 막 태어난 어린 꽃은 많은 걸 사랑했다. 친구들을, 신기한 세상을, 새롭게 배운 장난감이나 놀이, 단어 하나까지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다.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몰상식한 어른 마저 사랑했다. 볼이 맞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까지 가까이 다가가며 눈을 마주한다. 그런데 왜 널 원하는 이는 사랑해 주지 않을까. 만물의 실수를 용서하는 마음속에 오직 자신만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빙하기가 와도 상관없다. 네가 사랑하지 않는 나다. 너와 멸하는 세계를 구경해도 좋다. 네가 사랑하지 않는 나다. 만일 내일도 살아남으면 선생님과 그 족속들을 찾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 네가 사랑하지 않는 나다. 너를 비우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네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길을 잃고 헤매는 목소리가 침묵했다.) ...참 오래 함께 살았는데도 모르는 게 많아. 넌 나를 모르고 있어. 네 따스한 성정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돌아갈 가족이 없어지고, 딛고 살아갈 별이 끝내 무너진다고 해도... (...) 지독하게 너만 있으면 돼. 친구들의 죽음은 슬프지. 왜냐면 네가 밤낮으로 걔네들을 걱정하며 몸을 함부로 하니까. 세계가 내일도 굳건하면 웃긴 하겠지. 네가 사랑한 세계니까. ...행복하라 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어. 못 할 거 없어. (그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나’를 만들어가리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쉐리. (...) 미안해. 나도 비밀이 많아서. 전부 드러내고 미움받을 각오를 했다면, 홀로 고민하게 두지 않을 수 있었을 건데. (우리 함께 정원을 거닐며 사랑스러운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을, 진부하고 완벽한 행복을 흐릿하게 망상하며 너를 껴안았다.) 가지마. (...) 나 좀 사랑해줘.
 
쉐리 B. 로즈:(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알고 말하는 걸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너는 지금 나만 있으면 된다고, 한 번 쯤은 들어보고 싶었던 로맨스 소설 속의 절절한 사랑고백을 읆고 있었다.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는 결국 필사적으로 널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으로 무너지는 나의 세계가 너무나 비참해서, 너와 조금 다른 나의 사랑에 상처받을 네게 미안해서. 분명 네가 피워낸 미뉴에트임에도 우린 같을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헌터. 널 위한다면서 너만을 생각하지 않았어. 오만의 대가가 어떤 건지 알면서, 내가 바보 같아서 반복해버렸어. (이대로 널 꽉 붙잡고 있으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 놓지 마. 내가 놓아도 계속 날 끌어안고 보내지 말아줘. 그게 너의 사랑이잖아.) 사랑한다 말해도 괜찮아? 결국 너만이 남겨질 사랑인데, 그래도 괜찮아? 무서워, 너에게 잠깐 속삭인 사랑이 영영 네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 그럼에도 날 사랑하니까, 평소처럼 내가 원하는대로 해주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정말 헌터 네가 바라는 거야? 정말?..
 
헌터 버틀러:(어린아이처럼 우는 너를 내려다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눈물로 젖은 어깨 부근이 아파왔다.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을 방법이 없어, 품에 들어온 너를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으며 괜찮아, 괜찮아, 하고 중얼거렸다. 운명처럼 만나서 또 운명처럼 이별을 기약하는 애절한 우리를 보면 거리의 누구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러니 네 눈물은 이상하지 않다.) 네가 한 실수는 아주 작은 거야. 둘 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잖아. ...내가 깨어나지 못했던 열병의 나날에서, 어떤 심정으로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지... 알아. 이해해. (너의 두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고 볼에 입을 맞췄다. 비록 또 누군가의 선택이 틀려서, 세상에 영원한 겨울이 찾아오더라도 이 따스함은 변치 않을 것이다. 네 체온을 좋아해,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작은 소리조차 전부. ...이윽고 그거야말로, 라고 중얼거린 그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평생 원하던 거야. ...쉐리, 사랑한다고 말해줘. 극단적인 우리의 사랑 방식이 날 잠들지 못하게 만들도록 해줘. (...) 그렇게 해주면, 나. 네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이 세계를 기억할 수 있어. 돌아와, 돌아와. 나에게로 꼭. (쓰게 웃으며 부드러운 네 옷에 얼굴을 문질렀다.)
 
쉐리 B. 로즈:헌터가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선생님이 날 미워하는 것 같아서 슬펐어. 사실을 알게 된 헌터가 날 원망할까 두려웠고, 너에게 다 말해주고 안겨서 울고 싶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 힘들었어. (솔직하지 못했던 어린 날로 돌아간 것처럼 아팠던 유리조각을 하나씩 밖으로 꺼냈다.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면서도 어쩐지 속이 후련해져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우리 정말 바보였네. 왜 그땐 이렇게 다 말하지 못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려졌으려나. (젖은 뺨에 부드러이 내려앉은 감촉에 품에 한가득 넘치는 사랑을 껴안고 흔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네게 속삭인다.) 헌터 널 사랑해.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고 있지만 넌 그 중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스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존재야. 람피온이든 미뉴에트든 상관없어. 헌터가 어떤 모습이나 존재라도 난 반드시 너와 사랑에 빠졌을 거야. 그게 나의 운명이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끝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우리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막을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전해졌으면 좋겠어. (..) 정말 많이 사랑해. 평생 이 말을 하고 싶었어.
 
헌터 버틀러:(바람에 흩날리는 등불의 빛무리가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같다. 슬픔과 비극으로 물든 몸은 전보다 조금 가벼웠다. 널 보내고 나서 착하고 상냥한 삶을 살진 못하겠지만, 이후에 자랑할 수 있을 나날을 이어가자고 생각했다. 불규칙적으로 끊기는 숨을 뱉으며 홀린 듯 들었다.) ...그래. (...) 느긋하게 쉬다가 와도 좋아. 나보다 더 똑똑해져서, 세상을 빠짐없이 구경하고 와. 그래서 또 나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줘. (잠긴 목은 따가운데도 말이 막힘없이 나왔다. 사랑해, 네 사랑에 한없이 익숙해질래.)
... (고개를 들어 어두운 구름을 보며, 마지막 예언을 입에 담고 웃는다.) 내일도 비가 오겠네.
그리고 무지개가 뜨고, 꽃이 필 거야. (...)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피워둘 거니까.
 
헌터 버틀러:
정신
기준치: 45/22/9
굴림: 41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의식은 천천히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익숙한 암전.
 
깜빡, 깜빡.
 
헌터는 저택의 방에서 눈을 뜹니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호흡이 들뜹니다.
 
목구멍 안쪽은 말라붙은 것처럼 뻑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이 느껴집니다.
 
쉐리 B. 로즈:일어났어?
 
쉐리입니다. 분홍색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지나간 일들을 떠올립니다.
 
짐을 싸며 나누던 이야기, 화려하던 만찬, 쓰러져 잠든 아이들과……
 
적막하게 내려앉은 공기는 비단 다른 아이들이 잠들었기 때문은 아니겠죠.
 
쉐리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유난히 헌터의 머릿속을 들쑤십니다. 그러나 생각을 더 하기엔 열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쉐리는 잠자코 열을 식히기 위해 물수건을 갈아주다가,
 
쉐리 B. 로즈: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서 쓰러졌어.
 
저택에 헌터를 끌고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투덜거립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모든 이야기가 헛것이었던 것처럼…….
 
가물가물한 시야로 창밖이 보입니다.
 
어느새 보라색을 지나 남색으로 어둑하게 내려앉았습니다. 밤이 완연합니다…….
 
따라 창밖을 보던 쉐리가 말하길,
 
쉐리 B. 로즈:지금은 5월 31일의 저녁 11시야.
 
이제 한 시간이 막 남았다고 선고합니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기까지.
 
람피온을 살리고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함께 불타 죽어, 덩굴 아래에 묻힐 것인가.
 
선택지는 오직 두 갈래뿐이며, 19살의 마지막 밤이 가기 전에 선택해야 합니다.
 
열아홉의 마지막 장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흐르고, 시곗바늘은 멈추는 법이 없이 나아가니까요.
 
저택과 선택은 발음이 비슷합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선택이라고 고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이, 종말이 와닿았다. 이제 곧 끝이구나.
 
오늘의 이 순간마저 다 지면 영영 이별을 고하게 되겠구나.
 
그것이 세상과의 이별이건 너와의 이별이건 간에.
 
밤이 저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그저 야속합니다.
 
곧 여름이 시작될 거예요. 우리는 오늘, 나란히 여름을 맞이할 겁니다.
 
찾아오는 계절 앞에 사람이란 얼마나 무력한가요?
 
기어코 나그네의 옷을 벗겨내고 승리를 거머쥐었던 더위란 누구도 견딜 수 없었겠죠.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은 사람을 미치게 하기 딱 좋았습니다.
 
람피온의 양 뺨이 홧홧하니 붉습니다.
 
저택의 장미보다 곧 붉어질 그 색이 시작이자 마지막의 징조입니다.
 
자, 우리의 마지막을 위하여, 계절의 페이지를 넘길까요.
 
쉐리 B. 로즈:괜찮아? 아까 그대로 숲으로 가지말고 저택으로 돌아와서 외투랑 우산을 챙길 걸 그랬어. 안 그래도 열이 나는데 비를 맞아서 더 심한 것 같아. (차가운 손을 네 양쪽 뺨에 대주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헌터 버틀러:...비 안 싫어한다니까. (조심스럽게 얼굴에 닿은 손 위에 손을 겹쳐 잡았다.) 괜찮아. 앞이 조금 흐린데... 쉐리, 조금만 더 가까이 와줄래. (얼굴이 안 보여, 어쩌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었지만 초조한 어리광을 네가 거부할리 없단 확신이 있었다.)
 
쉐리 B. 로즈:싫어하는 게 문제가 아냐. 헌터가 감기에 걸려서 아픈 게 문제인 거라고! 이제 내가 옆에서 간호해줄 수도 없는데 걱정되게.. 항상 건강해야지. (열이 더 심해졌나?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붙였다.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음.. 아까보단 나아진 것 같은데. 시원한 거라도 갖다줄까? 물 마실래?
 
헌터 버틀러:내 몸 걱정은 하지마. 태어나길 튼튼하게 태어나서 험하게 써도 문제없어. (얼굴을 가까이하고 평온하게 대답하는 널 보며, 잘게 떨리는 웃음을 뱉었다. 이내 팔을 올려 머리 전체를 가볍게 끌어안는다.) ...아니. 이대로 있자.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유령을 단단히 붙잡는 것처럼,) 네가 시원해서 충분해.
 
쉐리 B. 로즈:그래도 안 돼! 나중에 어디 아프기라도 하면 음, 음.. 딱밤 열 대야! ..바보, 내가 시원한 게 아니라 헌터가 따끈따끈한 거야.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곤 안은 팔을 풀더니 이내 네 옆자리에 누웠다. 이게 더 편하지?) ..헤헤, 아깐 엄청 슬펐는데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잘 모르겠네. 너무 평화로워서 이대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아침이 될 것 같아.
 
헌터 버틀러:...겨울이어야 했는데. 네가 끌어안기 좋도록 말이야. (지금도 끌어안아 줄 거냐며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땀에 젖은 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고, 평소보다 탁한 숨소리를 뱉는 모습이 영락없는 환자다.) 그러게. ...이대로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겠다 싶어. (그러나 망상은 길게 이어지지 않으리라. 너의 머리만 쓸어내린다.) ... (...) 같이 잘래?
 
쉐리 B. 로즈:누가 들으면 여름에는 안 안고 다닌 줄 알겠어. (으이구, 몸을 네 쪽으로 당겨 딱 붙었다. 다가올 여름을 생각하면 뜨거운 온도였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응, 이러고 있자.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줄게. 그동안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까~ 항상 헌터가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줬으니 오늘은 특별히 내가 들려주고 싶은데. (즐거운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고민하다가) 아, 내가 옛날에 낸 퀴즈의 정답을 찾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정답이 뭐라고 생각해? 나는 헌터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을까요~..
 
헌터 버틀러:(여름에는 나름 자제한다며 습관적으로 뻗어진 팔을 도로 넣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장난스럽게 꾸중하는 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웃기만 했다. 이야기를 고민하는 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는 제대로 된 대답을 못했었지. 안아주고 넘겼던가... (...) 정답을 몇 번이나 주고받긴 했지만, ...또 말해보자면. (갑자기 손가락으로 네 콧잔등을 두드리면서 말한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랑 결혼하는 꿈을 꿀 정도로, 맞아?
 
쉐리 B. 로즈:... .. ...나 헌터한테 꿈 얘기해준 적 있었던가?! (잠깐의 정적, 열병을 앓는 것도 아니면서 순식간에 너만큼이나 얼굴이 붉어졌다. 분홍색 눈동자가 바삐 굴러갔다.) 그, 그런 꿈을 꾼 적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답은 아니야! 땡! 정답은.. (..) 세상의 예쁜 것들을 모두 가졌을 때보다 헌터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백 배는 더 기쁜 정..도?...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터무니없는 답이었다. 애초에 확실한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는걸!) 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저택에서 나가서 바쁘게 움직여야겠다, 그치. (직접 세상의 예쁜 걸 모두 찾아보고 사랑해봐. 그럼 정답이 나올 거야.)
 
헌터 버틀러:(꿈에 초대받는다. 꽃과 기둥으로 장식된 야외 결혼식장을 거닐며 행복하게 웃는 두 사람의 얼굴에 우리를 그려봤다. 사랑스러운 꿈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순수한 꿈에 부푼 너만큼이나 또 보고 싶은 꿈이었다.) ...꾸긴 했구나. 아쉽네, 꿈을 볼 수 있었으면 기뻤을 건데. (눈썹을 아래로 살짝 내렸다.) ... (...) 이런, 세상에서 가장 예쁜 건 이미 내 품에 있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찾았거든. (애정이 열병처럼 끓어 몸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느껴졌다. 정말 시야가 흐려져, 초점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찾아볼게. 아름다운 것들. 전부 끌어모아서 보다 보면 네 얼굴이 떠오르겠지.
 
쉐리 B. 로즈:또 나 놀린 거구나. 흥, 헌터한테는 꿈 얘기 안 해줄 거야. 나만 알고 있어야지. (심술쟁이!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리다 금방 표정을 풀었다. 어떻게 듣고 싶은 말만 저리 딱 골라서 해주는 걸까. 이제 와서 너에게 속마음을 읽는 초능력이 있었던 게 아닌지 다시 고민하며 엄지로 네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추억할 수 있는 물건 하나는 남겨둘 걸. 내가 너무 늦어서 헌터가 날 잊으면 어떡하지? 10년, 20년이 지나도 날 기억할 수 있겠어?
 
헌터 버틀러:(눈을 감고 마음을 편안하게 놓아준다. 두 사람이 눕기엔 작은 침대와 방 안을 꿉꿉하게 채운 먼지 향기는 긴장된 전신을 풀어주기에 적합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덧붙이며 헛웃음을 지었다. 세계가, 익숙한 꽃향기가, 눈이 보이는 모든 것이 선물 받은 듯 낯설고 애틋해졌는데 뭘 걱정하는 걸까.) ...기억해. 이번 생에 돌아오지 않아도, 내 무덤 옆에 네 것도 만들 거야. 거기에 쉐리 버틀러, 라고 적어야지. (곧 너의 양손을 감싸쥔다.)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도리를 다할 것을... ... (맹세합니다. 로맨스 동화를 좋아하는 네게 유난히 익숙하게 들릴, 흔한 말.)
 
쉐리 B. 로즈:벌써 헌터가 지어주는 세 번째 이름이네. 그게 내 마지막 이름이 되는 거야? (정말 괜한 걱정을 했다. 나의 걱정 한 조각에 맹세까지 해주는 사람이 너인데. 내가 잊어달라 했어도 넌 절대 날 잊어주지 않았겠구나. 울새 대신 울었던 지난 밤들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은 듯 했다.) 헌터,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또 바보같이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니 네가 날 찾으러 와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어른이 돼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날 데리러 오는 거야. 그렇게 했는데도 이번 생에 만나지 못한다면.. 다음 생에서 만날까? 그때도 만나지 못하면 그 다다음 생에서. 그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지? 흠, 흠.. 몇 번의 계절을 지나, 몇 번의 생을 반복하여도 그대에게 내 사랑, 내 모든 걸 드릴 것을 맹세합니다. (좀 더 멋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너처럼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 이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게 진심이니까. 후회나 미련은 없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됐어. 얼굴 진짜 빨갛다. (두 손으로 부드럽게 네 얼굴을 감쌌다.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네 사랑은 내가 남김없이 모두 가져갈게.)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마지막으로 듣게 될 한마디는 뭐가 좋아?
 
헌터 버틀러:...듣고 싶은 말 전부 들은 것 같은데. (힘없이 입 끝에 힘을 주어 웃는다.)
잘 자라고 해줘. 네가 나오는 꿈만 꾸도록.
 
쉐리 B. 로즈:그렇다면 다행이야. (..) 잘 자, 헌터. (다시 만나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날까지 좋은 꿈을 꾸길.)
 
...
 
점점 자정이 가까워지고, 열이 들끓기 시작한 몸은 아주 뜨거웠습니다.
 
쉐리와 닿아도 그 더위는 누그러들지 않고 거세게 들끓습니다.
 
작렬하는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운 온도를 힘껏 끌어안으면, 직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입니다. 정말로 마지막이에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이제는 끝.
 
마지막 불길이 치솟을 테니까요.
 
쉐리 없이 사는 것은 퍽 괴롭고 외로운 일이 되겠죠.
 
하지만 그래도 믿습니다.
 
헌터가…… 기꺼이 나를 견디고 살아 줄 거라고.
 
오직 그 믿음이 영원한 이별을 견딜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두려움과 서글픔의 끝으로 어딘가 닿았고, 마지막 생각은 아주 간절했습니다.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다면 딱 불타오를 정도로.
 
자정의 시계가 열두 번을 웁니다.
 
고래의 울음소리를 닮았습니다.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지, 혹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말미를 조롱하는지 창틀에서 울새도 함께 울고요.
 
우리도 울었던가요.
 
열이 옮겨붙고 곧 홧홧하니 달아올라선 눈물 따위는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끌어안은 네가 뜨겁다고 느꼈을 때.
 
손 아래에서 피어난 것은 선명한 장미였습니다.
 
완전한 형태를 갖춘, 선명하게 붉은 람피온.
 
화려하게 흐드러지고, 찬란하게 피어났습니다.
 
뜨겁다 못해 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간 그 색.
 
마치 이것을 틔우기 위해 살아온 생명처럼…….
 
그날 심은 씨앗이 모든 순간을 거쳐, 오늘에서야 개화한 것입니다.
 
간절한 바람은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집니다.
 
꽃잎이 낙화하는 것을 시작으로 쉐리는 한 점 한 점 부스러지고 흩날려,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토록 이별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별은 모든 것을 좀먹습니다.
 
열기 속에서 이지러지던 당신의 얼굴이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흑, 흑흑...
 
헌터는 머리맡에서 들리는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눈을 뜹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입니다.
 
한 번을 거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음울하고 울적한 아침이에요.
 
커튼이 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가 일렁입니다.
 
이 저택의 장미 향기는 도통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것 같더라니, 바닥이 온통 장미 꽃잎 천지네요.
 
이 저택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람피온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방 안에는 장미 향기와 헌터만 남아있습니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은 건조하고 따갑습니다.
 
장미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꽃말 그대로 정열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을 모아 얼어붙은 호수에 걸고 거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겠지요.
 
다 시들어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락방에 끊임없이 모아두고 모아두며...
 
이제는 압니다.
 
그 꽃들이 단순히 피고 지는 한때의 것이 아니었음을.
 
살아있고 살아가던 어느 목숨이라는 것을.
 
우울한 생각은 그만둡시다. 세수하고 짐을 마저 여미는 게 좋겠어요.
 
드디어 이 저택을 떠나는 날인걸요.
 
당신을 붙잡을 이도 따라올 자도 없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곳과의 작별뿐.
 
저택 내부는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방문을 열고 복도를 걸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화마가 남긴 탄내가 장미 향기를 지웁니다.
 
열린 문 틈새로, 식탁이며 바닥에 무수히 많은 꽃이 피어 있습니다.
 
헌터가 저택의 문을 열 때, 더운 바람이 불었습니다.
 
어서 오라고 세계가 인사하는 듯했지요.
 
숲은 길을 내고 흙은 당신에게 밟히기를 고대합니다.
 
이 숲의 끝에 도달했을 때, 당신은 비로소 가을을 맞이하게 되겠죠.
 
안녕히 가세요.
 
쉐리 로스트, 헌터 생존
 
헌터는 저택을 떠난 후 12달 후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Epilogue. 회전하는 미로로 이어집니다.
 
1997년 어느 날, 헌터에게 편지가 한 통 도착합니다.
 
우편함에 꽂힌 흰 봉투에는 붉은 실링왁스가 붙어 있습니다. 장미처럼 보이는 모양새네요.
 
발신인을 확인하면 람피온의 저택, 라이아입니다.
 
편지를 열어볼까요?
 
헌터 버틀러:(마녀란 비밀을 알았을 때부터 곱게 잠들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심드렁하게 편지를 열어본다.) ...고소장이려나?
 
「친애하는 헌터에게.
 
1996년의 졸업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저택에는 다시 11살 난 아이들이 가득해졌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추모할 새도 없이 새로운 아이들을 맞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될 예정이었죠.
 
하지만…… 운명이란 얼마나 얄궂은가요.
 
올해 람피온의 저택의 신입생 중에는 쉐리가 있습니다.
 
……믿기나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죠. 나도 첫날에는 그랬어요.」
 
편지지 사이로 사진이 한 장 동봉되어 있습니다.
 
……. 라이아의 말마따나, 처음 만난 쉐리와 똑같은 얼굴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습니다.
 
쉐리입니다.
 
「얼굴만 아니라 이름도, 성격도, 하는 일마저도 같아요. 심지어는 가지고 있는 초능력마저 헌터의 것과 똑같았죠.
 
Under the rose에서 검사한 결과, 믿을 수 없게도 유전자마저 일치한다더군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순진한 얼굴로 웃는 어린 너.
 
내가 두고 온 유년 시절의 모든 추억이 사진 너머에 갇혀있습니다.
 
그리고 헌터는 곧, 사진이 두 장이라는 걸 눈치챕니다.
 
다음 장에 담긴 것은 쉐리와 헌터 두 사람입니다.
 
「헌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 오래도록 고민했어요. 당신에겐 잊고 싶은 일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어요.」
 
아니, 아니, 아니. 헌터가 아닙니다.
 
그 눈동자는 분홍색이었거든요.
 
사진 속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특히 헌터와 꼭 닮은 그 아이는, 절대 쉐리를 놔주지 않을 것처럼 필사적입니다.
 
……그 무렵의 쉐리가 그랬듯이.
 
「Under the rose에서 드디어 미뉴에트의 복제에 성공했어요.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자랄수록 헌터 당신을 닮아가더군요.
 
…….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자라고 있어요. 헌터도 알다시피, 미뉴에트는 람피온을 맹목적으로 따르죠.」
 
펜을 든 손이 떨렸던 건지 글씨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라이아는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편지 끝에 쓰인 날짜는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날짜입니다.
 
19살이 된 쉐리가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이 될 테니까요.
 
그 뒤에 적힌 거리의 이름은 헌터가 그 당시, 숲을 빠져 나와 제일 먼저 도달했던 곳이고요.
 
그래요. 쉐리 또한 헌터를 잃은 채로…….
 
편지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당신의 손에 남은 것은 두 장의 사진과 한 장의 편지가 전부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돌아보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은 간신히 미로를 벗어났으니까.
 
답장하지 않는다면 사장될 이야기입니다.
 
미로의 회전축이 달그락거립니다.
 
헌터, 당신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부디 언젠가는 저희에게도 알려주세요.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흑, 흑흑...
 
헌터는 머리맡에서 들리는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눈을 뜹니다.
 
람피온의 저택을 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입니다.
 
한 번을 거르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음울하고 울적한 아침이에요.
 
커튼이 여름 바람에 흔들리고, 건조하고 따뜻한 공기가 일렁입니다.
 
이 저택의 장미 향기는 도통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것 같더라니, 바닥이 온통 장미 꽃잎 천지네요.
 
이 저택에서는 지천으로 널린 람피온이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방 안에는 장미 향기와 헌터만 남아있습니다.
 
눈물이 말라붙은 뺨은 건조하고 따갑습니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릴 필요는 없습니다.
 
쉐리의 죽음, 미뉴에트의 낙화 같은 여름의 비극은 다가올 가을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저 닿았던 입술, 손끝이 평소와 달리 따뜻했다고 기억해주세요.
 
여름의 온도를 떠올릴 때면 그 이름을 떠올리겠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지난 날에 오래도록 머물러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수 없을 테니까요.
 
헌터는 바닥에 쓰러진 장미 꽃송이가 눈에 익을 겁니다.
 
다락방에 가득히 무덤을 쌓아뒀던 말린 꽃과 꼭 같은 종류였거든요.
 
다만 죽은 채 말라붙은 것들과 달리 홧홧하게 불타는 꽃잎과 파르라니 빛나는 금술을 갖고 있습니다.
 
라이아가 이것을 호수의 둘레에 걸어 두면...
 
그로써 세계는 열 번의 겨울을 나겠죠.
 
짐을 챙깁시다.
 
...
 
가방을 닫고 잠그려는데, 책상 한쪽 구석에 놓인 오르골을 발견합니다.
 
고장이 나서 챙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부를 열어봐도 소리는 침잠하고 침묵하니 고요만 횡횡합니다.
 
가져갈까요?
 
헌터 버틀러:...일단은 이것도 추억이니까. (오르골을 소매로 잘 닦아서 챙긴다.)
 
흩어진 꽃잎들 사이 당장에라도 쉐리가 서 있을 것 같은데.
 
2층 침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 것 같은데.
 
이 문을 열면 너머에는 네가 왜 이리 늦게 나오냐며 투덜거리고 있을 것 같은데…….
 
부질없는 희망은 불티가 되지도 못하고 그을음으로 남아 가슴을 새까맣게 태웁니다.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붙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열아홉 번째 여름을 영원히 뒤로 할 수 있도록,
 
가을과 겨울을 지나 스무 번째 여름을 맞을 수 있도록,
 
당신의 장미. 미뉴에트와 영원한 이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떨어진 꽃은 말이 없으니 이별은 모두 당신의 몫입니다.
 
이 방이 이토록 작았던가. 10살 무렵에는 무척 크게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작다 못해 볼품없이 느껴집니다.
 
그건 꼭 누군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저 헌터가 자라버린 탓입니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서기 전에
 
헌터 버틀러:
관찰력
기준치: 55/27/11
굴림: 57
판정결과: 실패
 
바닥에 흩어진 꽃잎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태엽입니다.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둥근 타원형의 태엽은 기계장치의 씨앗처럼 보이기도, 굳어버린 눈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헌터는 그 태엽이 있을 자리를 알고 있습니다.
 
오르골에 딱 이만큼의 빈자리가 있었잖아요.
 
헌터 버틀러:... (늦게 찾았네. 누군가에게 미련없이 속삭이며 웃었다. 오르골의 빈자리에 태엽이 알맞게 들어가는 모양새가 보기 좋았다.)
 
오르골에 태엽을 끼우면 끼익, 끼익. 오래도록 기름칠하지 않아 뻑뻑한 부품들이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끝에 달린 작은 손잡이를 돌리면 드디어 담긴 소리가 세상에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흑, 흑흑...
 
머리맡에서 들리던 익숙한 울음소리. 그리고,
 
쉐리의 목소리입니다.
 
열 번째 여름부터 열아홉 번째 여름이 오기까지, 그 사이의 모든 목소리.
 
헌터가 알고 모르던 목소리들이 그곳에 담겨 있습니다.
 
태엽과 나사와 쇠와 철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어딘가 낡고 무뎌서 쉐리의 것 같다가도 전혀 쉐리의 것 같지 않습니다.
 
10살의 목소리는 너무 어린 탓에 정말 이랬던지 종잡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은 쉐리의 부속품입니다.
 
쉐리와 나누던 이야기, 둘이서 함께 내쉬던 호흡, 헌터가 주고받던 감정.
 
들어있는 것은 온통 우리의 기록이자,
 
추억.
 
결단코 잊을 수 없는 그 계절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금 헌터의 곁에 머무를 테지만, 그 어떤 계절도 지나간 나날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건 이미 지나갔고 사라지고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반복되는 상자 안에 갇힌 목소리가 지독하게 그리웠습니다.
myoskin